[BOOK世通, 제주읽기] (43)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서영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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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2012).
아르헨티나 출신의 정치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벨기에 태생의 정치이론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함께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의 초판이 출간된 것은 1985년이었다. 그 때 두 사람 모두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노동계급의 중심성과 경제의 우위를 부정하는 도발적인 수정은 불쾌한 것이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적 주체로서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이 관념론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적 생산의 양식이 정치와 의식을 ‘결정’하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다양한 조건 아래서 수행되는 정치적 실천이 강조되었다. 사회적 적대는 근원적인 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다양한 사회적 적대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담론적 실천’(discursive practices)과 그것을 통해 구성되는 헤게모니(hegemony)에 대한 뜨거운, 때때로 적대이기까지 한 논쟁을 촉발한 것이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1985년 당시에 논의되고 있었던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200쪽이 채 안 되는 작은 책[영어원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개념들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담론적 실천’, ‘헤게모니’, ‘접합’, ‘비어 있는 기표’ 등 낯선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은 고역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던지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독해하는 것이 고통스럽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게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매일 매일 깨어 있는 시간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시각을 통해 대상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인다. 철학자들의 역할은 이렇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혹시 ‘본다’는 나의 행위가 오히려 대상의 참모습을 인식하는 것은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감각과 인식, 지식의 구성에 대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통찰은 일상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논구해 왔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시도한 것도 이런 당연함 또는 무관심에 대한 일깨움이다. 그들의 경우에 질문의 대상은 ‘민주주의’였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학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그냥 말이 아닌) 개념이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를 정의하라고 하면 당혹감을 느낀다. 뭐지? 다수결? 대의제? 우리는 잘못된 교육을 받은 것일까? 라클라우와 무페의 대답은 도발적이다. 쉽게 정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폭발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민주주의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제도와 원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시 비판받고 변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어려운 개념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비어 있는 기표’(empty signifier)가 그것이다. 일단 기표라는 말이 어렵다. 이것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낭 드 소쉬르(Fernand de Saussure)가 창시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적인 용어다. 소쉬르는 언어에 대한 연구대상을 역사적인 언어의 변화에서 공시적인 구조로 전환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각각의 단어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소리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며 따라서 소리와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이다. 여기서 소리가 기표이고 그것과 결합된 개념이 기의(signified)다.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 필요는 없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이야기하는 비어 있는 기표를 이해하는 데 이미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라클라우 무페는 민주주의를 ‘기표’로 제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비어 있는’ 기표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교육받았고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은 그것이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민주주의는 고정된 ‘어떤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실천하고, 실현시킬 수 있게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한 순간도 멈추어 설 수 없고, 완전하게 고정될 수 없다. 그래서 민주주이라는 기표는 비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고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다름 아니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정치적 입장들이 반민주주의적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시장을 맹신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과 라클라우와 무페의 비판 대상이었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회든 갈등과 모순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갈등과 모순은 더욱 첨예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갈등과 모순은 흔히 적대로 경험된다. 그리고 그러한 적대는 현재 존재하는 제도가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충족되지 못한 필요(needs)가 사람들에게 의해서 자각되는 순간 드러난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자각의 순간을 관절이 틀어지는 ‘탈구’(dislocation)라는 말로 표현했다. 흔히 언급되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1조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도 그렇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상의 수많은 계기들을 통해 이렇게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는 원리가 위배되는 탈구를 경험한다. 탈구는 곧 적대가 드러나는 계기이기도 하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탈구는 ‘하나의’ 민주주의가 ‘또 다른’ 민주주의에 의해 도전받아 변형될 수 있는 계기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기표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도전과 변형이 가능하다.

2016년 말 한국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그런 탈구를 경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무페의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주어져 있는 민주주의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무능한 대통령이고 그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한 ‘비정상적인’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를 분노하게 한 것은 ‘지켜져야 할 원칙’을 위배한 사람들이었을 뿐인 것이다. 과연 이게 다일까?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민주주의라면 우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의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경쟁의 규칙을 정유라라고 불리는 여성 한 명이 파괴한 것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의 희망과 미래를 빼앗고 있는 경쟁의 규칙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지만 그것에 도전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실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질서 또한 완벽하게 고정된 것일 수는 없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급진적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라고 불렀던 것이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찾아온 민주주의를 급진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있는 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촛불의 의지가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탈구를 적대적으로 인지하고 그것을 사회가 한 단계 더 민주화 되는 계기로 발전시키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한 것처럼 이야기했던 수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여전히 입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단지 대통령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상성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덧 씌어 놓은 합법과 시민성의 ‘정상성’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폭력과 비폭력을 나누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갈라치면서 지금의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국민의 열망을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끌어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실천이다. 우리가 가진 불만과 열망을 표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비어 있는 기표인 민주주의에 민중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 말이다. /서영표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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