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2)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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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게 자란 한라봉. 제공=김연미. ⓒ제주의소리

한라봉 열다섯 개가 한 상자 안에 담겼다. 노란 속지에 싸인 노란 과일 색깔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찬란한 아름다움. 눈부심을 덜어내려는 듯 꼭지 마다 매달린 초록색 이파리가 눈가의 주름살을 풀어준다. 완벽한 조화다. 내가 만들어놓고도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가만히 들여다보다 마지막으로 비닐 포장을 덮었다. 이제 이 과일은 내 손을 떠나 소비자에게 갈 것이다. 다 키운 딸을 시집보내듯, 자꾸 상자에 손이 간다. 흠집이 있는 것은 골라내고 크기도 일정하게 골라냈고, 이파리 방향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다. 신부화장을 끝내고도 자꾸 들여다보는 얼굴만 같다. 

과정은 힘들었으나 열매는 아름다웠다.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았고,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과일 하나 하나에 맞춰진 초점이 일년이라는 시간이 가는 동안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다. 그 땀과 노력을 먹고 이렇게 열매들은 잘 자라주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땀방울 속에서도 건 듯 건 듯 불어오는 바람처럼 행복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새벽공기와 더불어 코를 자극하던 귤꽃 향기, 동녘하늘에 번지는 아침 여명, 비오는 날 일손을 멈추고 듣는 빗소리, 일하다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자고 나면 이만큼씩 자라있는 열매들의 크기,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느끼는 기분 좋은 피로감... 그 많은 행복들이 온전히 나를 위해 있었고, 난 누구에게도 나누지 않고 그 행복을 누렸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간의 노력을 다 보상받은 것 같은데, 이렇게 고운 열매까지 내 몫인 것이다. 

농사짓는 것 못지않게 수확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노지 감귤이 다 마무리되고 설 명절을 앞둔 시점에서부터 따는 시기와 판매 방법을 결정하느라 전전긍긍했다. 제대로 팔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올해는 예년보다 귤 값이 좋은 편이어서 수확을 결정하기도 전에 상인들이 돌아다니며 밭떼기 거래를 종용하고, 가격을 흥정해왔다. 내가 키운 과일을 높은 가격에 팔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다르지 않겠는가. 노지 감귤도 여섯 번씩 일곱 번씩 골라가며 따서 파는 사람들은 남들 두 배 가격으로도 판다는데, 거기까지는 않더라도 남들만큼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들만큼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일까. 인터넷을 뒤지고,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딱히 정확하게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판단과 결정은 내 몫이었다. 

그간 관리해온 밴드와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주문이 들어왔다. 오랜 지인들이 알음알음 입으로 소개시켜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설 명절 차례 상에 올릴 거라며,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선물할 거라며, 혹은 부모 형제의 주소를 문자로 찍어 보내주었다. 맛있다는 감사의 문자 한 통으로 난 우리나라 대표 농부나 된 듯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높은 가격에 팔아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처음 생각은 잊었다. 대신, 충청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경기도 바닷가 어느 동네에서, 서울 어디에 산다는 내 또래 가정주부와 회사원들과 나와 비슷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내 재산이 되었으니, 돈 번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또한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입안 가득 퍼지는 새콤달콤한 과즙처럼 상쾌한 행복 한 알도 귤상자 한편에 담아본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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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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