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 별이 보이는 집에 달음 내닫는 됫박에
  
〈가난〉

제주 민화(民話) 한 토막이다. 흥미진진해 눈을 떼지 못해, 온종일이라도 귀를 열어 놓고 싶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전래돼 온 세간의 옛날이야기라 뜻을 풀어놓고 나면 포복절도하리라.

빌 보는 집*에 다(아래아, 이하 표시 #)름 닫(#)는 쪽박에 앙작 고(#)래에 벌적 놀래에 환상 타단 박박 가(#)란 범벅 쑤어 놘 먹단 조간. 아방은 어멍을 때(#)려부난, 어멍은 용심난 아들(#)을 때(#)려부난, 아들(#)은 개를 때(#)려부난, 개는 고냉이 물어부난, 고냉인 중이를 물어부난, 중인 씨뿌리개 쐬무라부난, 씨뿌리개가 터전 잘잘 새언, 장독(#) 암톡(#) 몬(#)닥 주서먹어 부런. 또 흉년 들언 환상 타 먹언 마씸. 

(방에 앉아 별 보는 집에서 쌀 한 톨 꼴 본 지 오래돼 내달리기라도 할 듯한 됫박에, 덜걱거리는 빈 소리만 요란한 맷돌에, 벌떡 놀란 나머지 관청에서 주는 환상 타다 박박 갈아 범벅을 쒀놓고, 먹다 보니 양이 적어, 아비는 어미를 때려 버리니, 어미는 부아가 나서 아들을 때려 버리니, 그 아들은 죄 없는 개를 때려 버리니, 개는 또 고양이를 물어 버리니, 고양이는 쥐새끼를 물어 버리니, 그 쥐새끼란 녀석은 그만 씨앗 담아 뿌리는 맹탱이(작은 멱서리)를 갉아 먹어 버리니, 명색 맹탱이란 게 터져 잘잘 새니, 수탉과 암탉이 얼씨구 좋아라 주워 먹어 버렸더라. 또 흉년 들어 환상 타 먹었지요.) *빌 보는 집 : 지붕 허술해 방에 앉아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집. 가난의 상징 

딴 세상 소리로 들릴 테지만, 엄연히 우리 옛 조상님들이 겪었던 얘기다. 

지금은 풍요의 섬이지만 제주의 옛날은 가난했다. 보릿고개가 비단 제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나, 척박한 땅, 제주는 우심했다. 적빈(赤貧)으로 절대빈곤이었다. 쌀 구경한 지 오래어 달아나기라도 할 것 같은 빈 쪽박, 거피(去皮)할 곡식이 없어 소리만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맷돌하며. 이만저만 궁상이 아니다. 말로 하니 민화(民話)이지, 그림으로 그렸다면 궁핍한 시대상을 담아 낸 민화(民畵)가 아닌가.

그래도 가슴 치면서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관에 가 환상을 타다 범벅을 쒀(밥보다 훨씬 절약되므로) 식구가 두레상을 받아 앉았는데 그만 양이 턱없이 모자라지 않은가. 등에 붙은 허한 뱃속을 채워 주지 못했다.

그 다음의 전개가 극적이다. ‘아방→어멍→아들(#)→개→고냉이→중이→씨뿌리개→장독(#)→암톡(#)’으로 흐르며 원망하고 탓하며 화풀이하다 결국엔 봄에 파종할 씨앗까지 결딴나고 만다. 그래서 또 구제 받을 수가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먹을 것 타러 관청 걸음이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한국인의 ‘끈기’를 얘기한다. ‘죽고 죽어→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흙)→일편단심’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 속의 바통 터치는 산 넘고 물 건너 듯 여간 끈질기게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초식동물의 창자처럼 길다. 끈기의 극치다.

‘환상(還上)’이란 왕조 때, 봄에 받은 환곡을 가을에 바치던 일로, 관에서 사창(社倉)에 저장했다가 백성에게 봄에 꿔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던 제도다. 

밥은 커녕 죽이나 범벅도 쒀 먹지 못하는 궁핍에도 우스갯소리로 풀어낸 제주인들의 해학과 낙천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방이 어멍을 때(#)려부난’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극명히 드러나 있지만 시대상이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안주인인데 그 ‘어멍 용심나게’ 생겼다. ‘용심나다’는 화나거나 부아가 나다는 말인데 그보다 더한 감정 표현이면서 거기다 ‘슬며시’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지 않은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 눈물 흘리는 격이니…. 

가난으로 빚어진 사람의 감정이 집에 기르는 동물로, 나중엔 씨뿌리개 같은 무정물에까지 전이됐으니, 감정 표현이 무궁무진이다. 

아이들에게 옛날 옛적의 ‘가난’을 전설처럼 들려줄 때, 이 이야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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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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