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9) 내 땅 까마귀는 검어도 반갑기만 한다
  
까마귀는 새까만 새다. 온몸이 까만 깃털로 덮였을 뿐 아니라 머리에서 발끝까지 까맣다. 어느 한구석 검지 않은 데가 없는, 완전무결한 검정이다. 조물주가 녀석을 만들 때 마구 옻나무 칠을 해댔는지 모른다. 새까매 팔색조처럼 화려하기는 커녕 태생적으로 예쁜 축엔 끼지 못한다.

그래도 까마귀는 정든 텃새다. 언제부터인가 마을을 떠나 산으로 오른 뒤로, 문득  녀석이 그리울 때가 있다. 뜻밖에 고향사람을 만나면, 떠오르는 녀석. 그것도 도시 복판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반가워서 펄쩍 뛰게 된다. 평소 서먹하던 사람도 반가워 무심결 손을 잡아 흔든다. ‘내 땅 까마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연 가운데 피붙이 다음으로 지연(地緣)을 치는 것일 테다.

“나 땅 까매긴 검어도 반갑나”, 명절 때만 오면 우리는 마음속에 그리던 ‘고향’이라는 말 속에서 새록새록 인연의 끈끈함을 느끼곤 한다. 

손꼽아 기다렸다 선물 가방을 챙기고 고향 가는 길에 나선다. 도시에서 고향으로 물밀 듯 흘러내린다. 도도한 귀성 물결로 나라 안이 온통 들썩인다. 연전에 예매하는 열차표를 사고, 잽싸게 항공권을 예약해 둔다. 고향이 섬이면 차를 내려 다시 여객선을 갈아타면서 마음이 앞서 가 있다. 하늘, 땅, 바다가 귀성객들로 시끌벅적하다. 고향 가는 길이 흥겹다. 

멀면 열서너 시간, 길 위에서 거북이걸음으로 시달린다. ‘귀성길 고생길’, 연년이 듣는 말이다. 어제 오늘의 일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귀성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 같은 민족의 대이동으로 새로운 풍습이 된 지 오래다. 인구 1000만 거대 도시 서울이 텅 비어 공동(空洞)이 된다. 귀성 뒷 풍경이다.

공항이나 부두 터미널 대합실은 귀성인파로 인산인해다. 인파 속에 오랜만에 내려온 손자손녀를 번쩍 안아 들추는 장면은 명절 때 흔히 보는 훈훈한 풍경이다. 보기만 해도 콧등이 시큰하고 가슴 더워 온다. 

어느 손가락인들 물어 안 아플까. 부모 눈에 예쁘지 않은 자식이 있으랴. 다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장하기만 하다. 마침내 ‘나 땅 까매귀’가 존재감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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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5년 설 연휴를 앞둔 1월 17일, 제주국제공항에서 반갑게 조우하는 가족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언뜻 떠오르는 속담이 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털이 바늘처럼 꼿꼿한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이 부드럽다고 옹호한다 함이니, 자기 자식은 자랑스럽고, 부모 눈에 자식은 다 잘나 보인다는 말이다. 자식 자랑한다고 불출(不出)이라 하면 무슨 상관이랴.

명절을 예전엔 명일(名日)이라 했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축일(祝日)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명절 풍습도 많이 달라졌다. 설에 입는 옷이 설빔, 그날 먹는 음식이 절식, 그네뛰기·연 날리기 등은 그날 즐기는 놀이였지만 이제는 사정에 따라 한다. 심지어 설 때면 동네 웃어른을 찾아봬 절하고 덕담 듣던 세배도 사라져 간다. 세배하는 사람들로 골목이 출렁거렸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귀성(歸省) 행렬. 명절 때면 영호남으로, 제주로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객지의 자녀가 부모와 친척을 뵙고 친구를 만나러 고향을 찾는다. 귀성이란 말 속에는 ‘고향’과 ‘부모’가 핵심에 자리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데, 흘러간 옛 노래에 한자리 빠질 수 있으랴.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멀리 타향 낯선 거리 헤매는 발길,/ 한 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하늘을 달려갑니다.’ 

초가삼간이면 어떠랴.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근본이고, 부모는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육친이다. 고향과 부모란 말엔 그 바탕에 그리움이 흥건히 고여 질퍽하다. 

한낱 동물에게도 귀소(歸巢) 본능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 나갔다가도 저가 살던 곳이나 둥지를 찾아온다. 

지연과 혈연에 대한 그리움의 문화적 표출, 귀성! 

“나 땅 까매긴 검어도 반갑나”라 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 민족 정서에 딱 맞는 말이다. 해마다 명절 때면 정겹게 되살아나 귓전을 울리는 말, 귀성! 

덧대고 싶은 말이 또 있다. “맹지옷은 육촌까지 또똣혼다." (명주옷은 6촌까지 따습다) 친족 가운데 한 사람이 귀한 몸이 되면, 자기까지 그 덕을 입게 된다 함이다. 

집안에 인물이 나면 빛이 집안 구석구석 드는 법이다. 가문의 영광 아닌가. 

“맹지옷은 육촌까지 또똣혼다.” 설 때 주고받으면 덕담이 될 터. 세상사 다 내려놓고 복 많이 지으시기를….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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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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