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3) 선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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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을 기다리는 한라봉 박스. ⓒ 김연미

설 명절이 가까워지면서 한라봉 주문량이 많아졌다. 설 명절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보내기 위함이다. 주문의 대부분은 설 명절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고, 그러기 위한 마지막 날짜를 택배 회사에서는 제시하고 있었다. 물건을 준비해서 보내는 농부들이나, 운송을 책임지는 택배회사나 설이 가까워질수록 전쟁같은 시간들이 이어졌다. 농산자와 소비자간 직접 유통은 생각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뤄져서 하루 종일 택배회사 주차장에는 농민들의 차량이 들어오고 나갔다. 깔끔하고 예쁘게 포장된 귤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그저 흐뭇했다.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는 대부분 모임이나 단체인 경우였고, 하나나 두 개씩 주문하는 사람들은 지인이나 가족들끼리 나눠먹기 위해 주문을 하는 경우다.

김영란법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농가의 타격이 클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처음 실감하는 이번 설 명절에서 김영란법으로 부터의 영향은 없었다. 물론 농가마다 차이는 있어서 실제로 피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몇 십만원짜리 선물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김영란법을 못마땅해 하면서 대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농가에서 팔 수 있는 상품들 중 5만원 이상을 넘기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갈수록 가벼워지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한다면 농산물을 설 선물로 고른 사람들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지인 몇 명에게 택배 판매를 했던 게 전부여서 별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 의외로 주문이 많았다.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귤을 따고 포장을 해서 택배회사에 연락을 하면 차가 와서 실어갔다. 주문 내용에 맞추어 크기를 고르고, 중량별로 나누어 담다 보면 꼭 한 두 개 오류가 났다.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큰 사이즈 물건을 보낸다든지, 최종 수량에서 한 두 개 차이가 생겨 찾다보면 같은 이름을 두 개 붙인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좋았다. 찾아내 수정하고 다시하면 되니까 말이다. 물건을 다 보내고 먼저 물건을 받은 사람들이 잘 받았다는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시름 놓고 있으면 물건을 못 받았다는 사람들이 꼭 생겨났다. 택배회사 직원이 잘못 배달했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 받아놓고 말을 안해서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운송장번호를 확인하고 일일이 물건의 위치를 파악해 못 받은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도 일이었다. 택배물건이 설 명절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택배회사 직원들의 실수로 한 두 개 빠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택배회사에 사고처리를 하면 물건 값은 돌려받을 수 있지만 제때에 물건을 보내고 싶고, 받아보고 싶었던 사람들한테는 참으로 난감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돌려받은 물건 값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선물이란 게 마음의 표시이고, 마음은 예민한 거라서 그 시작점과 도착점 사이에서 우리는 그 본 뜻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늘 이렇게 구멍이 생기곤 하는 것이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데 아직 이렇다 할 묘안이 없다.

설 연휴가 시작되면서 배송전쟁은 끝났다. 전쟁터 같았던 택배회사 주차장도 텅 비었다. 과수원에는 빈 나무들만 남았고, 귤이 매달렸던 흰 끈만 바람에 하릴없이 날리고 있다. 주문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노트도 가방 한 구석 무념무상인 표정으로 누워있다. 고르고 골라 뒤로 내쳐졌던 불량품 귤들이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박스 안에서 파릇파릇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설 명절이다. 조상님께 차례지내고 친척들과 밀린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으면서 즐기기만 하자. 한라봉을 재배하는 농부에게 설 명절은 대나무 마디와 같은 것. 정신없이 그 마디하나를 넘고 이제 다시 시작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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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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