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4) 그리운 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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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 한쪽에 별꽃이 피었다. ⓒ 김연미

별꽃이 피었다. 과수원 한쪽, 무리를 이룬 초록의 잡초들 사이 하얀 점들이 찍혀 있다. 서서 볼 땐 하얀색 점이지만 허리를 약간 숙이면 그 점은 작은 우주와 같은 꽃잎으로 제 정체를 드러낸다. 허리를 굽히고 예의를 갖추어야 비로소 제 얼굴을 보이는 꽃이다. 지나는 시선들을 잡아끄는 화려한 색깔도, 커다란 몸집도 없지만, 작으면 작을수록 제 안의 힘을 믿으며 자존심을 잃지 않는 꽃 송이들. 초록 이파리를 발판 삼아 줄기를 만들고 그 줄기 끝마다 하얀 꽃을 피웠다. 아직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봉오리들 머리 위로 2월 햇살이 어르듯 내려앉아 있다. 

‘북두칠성 꼬리쯤에서 저만 슬쩍 떨어져 나와 연애 한번 못해 보고 다시 별이 되었다는, 빵모자 성긴 치아가 어쩜 너였는지 몰라’로 시작하는 고정국시인의 <그리운 별꽃>을 생각한다. 두 갈래로 나눠진 하얀 꽃잎을 보고 시인은 성긴 치아를 생각했었나 보다. 어린 아이 잇몸에 두 개 돋은 앞니처럼 쌍을 이룬 꽃잎들이 곱다. 별꽃과 쇠별꽃이 비슷하다 하는데, 아직 내게는 그 차이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 비슷하게 생긴 꽃이 다 별꽃이고, 쇠별꽃이다.

하우스 안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 매섭고, 하루걸러 눈 소식이 오가는 2월 초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망울이 맑기만 하다. 세상의 어려움 같은 거 자기완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가만히 있으면 나도 하얀색 표정이 된다. 세상에서 묻힌 오염들을 다 씻어내고 잠시 순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담아두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눈으로 볼 때와는 달리 꽃들은 선뜻 카메라 앞에 나서주지 않았다. 자꾸 초점을 빗겨가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엉거주춤 앉아있던 내 자세가 자꾸 아래로 내려간다. 최대한 그들과의 눈높이를 맞추고 나니 겨우 포즈를 취해 준다. 순수하게, 때론 몽환스럽게, 혹은 요염하게.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그래서 얻은 몇 장의 사진.

그러는 나를 보고 남편이 또 혀를 찬다. 그렇게 예쁘다 예쁘다 해 놓고 결국은 다 뽑아낼 거 아니냐는 표정이다. 맞다. 과수원에 피는 풀꽃들과 농부는 이렇게 서로 어긋난 운명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애타는 마음을 카메라에나 담아 둘 수밖에...

아주 어릴 적에 이 별꽃 순으로 된장국을 끓였던 기억이 있다. 제주에서는 이 별꽃을 콩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에서 주는 이미지와 된장국의 이미지가 얽혀 내게는 구수한 기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는 꽃이다. 그 때, 텃밭에서 여린 콩풀을 들고 오셨던 아버지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되셨고, 어머니의 기억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여전히 내게 이 별꽃은 콩풀이고 된장국의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꽃이다.

다시 고정국님의 <그리운 별꽃> 마지막 수.

‘볼수록 천치 같다는 꽃 한 송이 만나기 위해 대낮에도 반 촉짜리 등을 켜 두는 그대, 오늘은 우리 텃밭에 별이 몽땅 내려와 있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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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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