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0) 내 팔자야, 내 사주야

〈자치(雌雉)> 
(암꿩, 까투리)

“내 팔자야. 내 사주야,
(“내 팔자야, 내 사주야,)

원통호고 외롭고 억울호구나. 이 덤불 저 덤불 트멍 고망 초지멍 아기덜 열 오누이 깨와 놘 키왐시난 비보름 쳐내 오누이 죽어 불고, 먹을 거 으시 굴먼 오누이 죽어 불고, 징그러운 구렁이 놈 혼 머리 솝쳐 불고.
(원통하고 외롭고 억울하구나. 이 덤불 저 덤불 틈이며 구멍 찾으며 아기들 열 오누이 낳아 놓고 키우는데, 비바람 쳐서 오누이 죽어 버리고, 먹을 것 없어서 굶어 오누이 죽어 버리고, 징그러운 구렁이 놈 한 마리가 삼켜 버리고.)
 
도란 댕겸시난 소로기 놈 초자완 나호고 아기덜 키우멍 살아보겐 호여라. 털 지선 도저히 못 살키엔 호난 애기 호나 오꼿 찬 가 부러라.
(다니노라니 솔개란 놈 찾아와 나하고 아기들 키우며 살아 보자 하더라. 털이 많아 도저히 못 살겠다 하니까, 아기 하나 그만 확 차고 가 버리더라.)

가마귀가 초자완 아이덜 키우멍 곹지 살아 보게 호길레 너미 꺼먼 못 살키엔 호난 애기 호나 물언 노라나 불고.
(까마귀가 찾아와 이이들 키우며 같이 살아 보자 하기에 너무 까매 못 살겠다 하니 아기 하나 물어서 날아가 버리고.)

촘매 놈이 초자완 모든 날짐생은 나 앞에 꼬딱 못혼다. 나호고 살민 아기들 잘 키우곡 누개도 거들떠보지 못하게 도랑 살키엔 호길레 날개 씨고 꽝 씨연 못 살키엔 호난 애기 하나 딱 또련 물언 가 부러라.
(참매란 놈이 찾아와 모든 날짐승이 내 앞엔 까딱 못한다. 그러니 나하고 살면 아기들 잘 키우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못하게 데리고 살겠노라 하기에, 날개 세고 뼈가 세어서 못 살겠다 하니, 아기 하나 딱 때려선 물고 가 버리더라.)

날짐생 앞이 몬 잃고 개 고냉이 직시로 몬딱 바쳐 둰 이 산 저 산이서 살암시난 자치 명지 동전 달고 아로롱 바지에 다로롱 저고리에 호랑색 긴 꼬리에 풍채 좋은 웅치 서방 만난 산중에서 살암고라."
((아이들) 날짐승한테 모두 잃고 개 고양이 몫으로 모두 바쳐 두고 이 산 저 산에서 살고 있더니, 목도리 동정 달고 아롱다롱 바지저고리에 호랑이 같은 긴 꼬리에 풍채 좋은 장끼 서방 만나서 산중에 살았노라.")

자치(雌雉)는 암꿩, 그러니까 까투리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꿩이라는 날짐승에 그치지 않고, 그럴싸하게 한 여인에 빗대어 그녀의 한 생을 풀어냈다. 꿩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산중에서 열 마리 새끼를 낳아 기르며 산전수전 다 겪던 일을 인간사에 대입한 기법이 실감으로 넘쳐나고 있다.

비바람은 풍우성상(風雨星霜)이요, 구렁이, 솔개, 까마귀, 매는 온갖 사탕발림으로 다가서며 유혹하던 주변 남정네들이 아닌가. 개와 고양이는 삶을 훼방 놓거나 힘들게 하던 위협적인 존재 곧 포식자나 장애물로 비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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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을 품은 까투리 등에 비온 뒤 햇볕이 들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아이들 여럿을 잃었지만 끝내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놓지 않은 끝에 좋은 서방님(장끼)을 만나 잘 살았다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생애가 그나마 해피엔딩, 호종적인 결말(好終的 結末)로 끝이 났다. 사필귀정이요 인과응보다.

제주여인들의 애환을 담은 한 토막 이야기에, 세파에 부대끼며 살기 힘들었던 시절 삶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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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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