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5) 연극이 끝나고 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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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를 수확하고 난 과수원. ⓒ 김연미

어느 순간인들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있었겠는가마는,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어서 더 아름다웠던 순간은 금새 지나가버렸다. 내 줄 것 다 내준 빈 몸으로 바람이 되어 서 있는 나무. 노랗게 잘 익은 귤을 가득 담고 불끈 불끈 근육을 자랑하던 남자의 얼굴에도 땀방울을 맺게 하던 귤 상자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가위질 소리와 일하는 아낙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잘려나간 탯줄처럼 하얀 끈들이 대롱거리고 있다. 목청 높던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찰랑찰랑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 우루루 귤 쏟아지는 소리. 그 소리와 사람들이 사라졌다. 환상이었던가. 마지막 열매를 다 주고 난 과수원은 황량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텅 빈 무대와 객석의 허무함이랄까.

열매는 달았다. 새순이 돋아나던 봄부터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태양을 건너고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햇살의 양분까지 모두 모아담은 과즙. 거기에 농부의 땀과 부지런함까지 담았으니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하면된다의 신화 아래 게으름이나 무능력이란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었으니 나는 다행 중 다행이었다. 누군가에게 자꾸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질 만큼.

일 년이란 시간이 내게 준 것은 단 열매만이 아니었다. 하루 한 번쯤 하늘을 보며 살자던 새해 소망마저 며칠 못가 흔적 없이 사라지던 날들이었다. 그런 삶이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아침마다 붉은 태양과 눈을 맞추고, 온전히 제 것인 양 하늘을 차지하던 구름의 심기도 눈치껏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활자로 익혔던 작은 꽃들의 이름을 그들의 촉수에 대고 나직이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서로의 안부를 건넬 수도 있게 되었다. 수평과 수직의 인공적인 것들에서 둥글고 부드러운 자연으로의 회귀. 내 삶에 찾아온 행운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 열매가 모두 단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책에서의 소외, 사회로부터의 소외, 경제적으로의 어려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주어진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거대 자본에 밀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 포클레인에 의해 뿌리째 드러난 귤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삶의 뿌리가 뽑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다시 무대로 돌아와 선 지금.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는 오로지 내 손에 달려 있다. 뮤지컬 감독처럼 다시 일 년을 구상한다.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내 무대는 더 많이 풍성해지고 세밀해지리라. 기쁨과 환희, 아름다운 감동으로 가득찬 무대를 위하여 두 손에 장갑을 낀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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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는 막을 내립니다. 김연미 시인은 잠시 휴식 뒤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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