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2) 아리스토텔레스, 2017년 우리들의 정치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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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 아리스토텔레스 (지은이) | 천병희 (옮긴이) | 도서출판 숲 | 2009-08-10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순실 사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까닭은 ‘한가한 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을 빌려서 표현하면 ‘성(誠)의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동양 경전인 『중용(中庸)』은 성실과 정성을 표현하는 이 낱말을 찬양하며 “불성무물(不誠無物 :성실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이라고 했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엄정했습니다.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을 가리켜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소중히 하는 것이 경건하다”(<니코마코스 윤리학>, 22쪽)고 선언한 게 대표적이죠. 『논어』 식으로 표현하면 “인(仁)을 실천하는 데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꽃피기 어렵죠. 아리스토텔레스 개인의 자질에다 운까지 따랐으니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게 철학했던 사람으로서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원에 힘입어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과 자연사박물관을 확보할 수 있었고 158개 나라의 정체(政體)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대한민국과 제주도에 관한 것도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주도와 대한민국이 나날이 새로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폴더를 벗어날 수 없죠. 개인적으로 재밌는 사실은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가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도시국가와 닮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숨 쉬는 공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최적화된 상태로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먼저 최순실 사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부터 들어보시죠.

“체력, 부, 연줄 등 행운의 선물을 과도하게 받은 자들은 복종하려고 하지 않고 복종할 줄도 모른다.” - <정치학>, 230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결함이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당시의 가정은 지금보다 수직적인 위계구조를 갖춘 ‘일가(一家)’를 말합니다. 혹자는 최순실 하나로 나라가 이다지도 떠들썩할 필요가 있는지 말하지만 “부자의 탐욕은 민중의 탐욕보다 더 파괴적”(정치학 236쪽)이기에 나라가 기울 만큼의 충격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이 전격 구속되었습니다. “부자가 빈민에게 부당한 짓을 하면 부자들에게 부당한 짓을 했을 때보다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징벌관이 제대로 반영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그룹 경영자가 빈민에게 한 부당한 짓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경련이라는 단체의 짬짜미로 정의가 얼마나 왜곡되는지 생각할 때 그 죄가 작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영 차질이 우려된다는 여러 신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판결은 집행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같은 책 356쪽)이기에 구속 이후의 상황이 더욱 기대됩니다. 재계의 불합리한 관행을 돌아볼 소중한 기회이기 떄문입니다.

2017년도 대한민국에서 이다지도 황당하고 모욕적인 정치 농단이 발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이 이러한 사태를 방조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합니다.

대중은 명예보다 이익을 추구한다. 그 증거로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만 않으면 그들은 지난날 참주정체를 용인했고, 지금은 과두 정체를 용인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340쪽)

신구범 전 지사가 한 강연에서 꺼낸 박정희 향수, 전두환 향수만 보아도 경제만 성장시키면 민주주의야 상관없다는 인식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경제란 가정경제입니다. 즉, 사회 안에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이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경제와 민주주의를 분리시키는 사고는 오래된 우리의 관습이지만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낡은 사고방식입니다. 더는 돈 버는 기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최순실 사태를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평등과 정의가 실종된 현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등과 정의는 왜 실종된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들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자, 권력자들에게는 하찮고 귀찮은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이 평등과 정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권력자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평등과 정의가 숨 쉴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평등한 일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세습왕정은 평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불평등한 것”(같은 책, 262쪽)일 뿐 불평등한 자들 사이에서는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죠.

제주도, 싸구려 관광지가 되지 않으려면?

얼마 전 중국인 관광객들이 제주국제공항에 버리고 간 쓰레기로 '아수라장'이 된 사진 한 장 때문에 매우 불쾌했습니다. 제주도가 마치 싸구려 관광지가 되고, 제주도민이 싸구려 관광지의 종업원이 된 듯한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사정을 취재한 기사를 보니 이 사건은 대기업과 면세점, 공항이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든 가족이든 나라든 스스로를 망가뜨린 이후에야 남에게 망가질 수 있다는 맹자의 말처럼 된 것을 보니 화가 나기보다는 부끄러웠습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정상적인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이든 제주특별자치도든 우리 공동체가 존재하는 목적을 먼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모든 국가(polis)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 무릇 인간의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선(agathon)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15쪽)

하지만 우리들은 훌륭한 삶이나 선(善)이라는 가치는 뒷전이고 ‘생존’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했습니다. “몸 전체(국가)가 파괴되면 손과 발(국민)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같은 책, 21쪽)이죠. 이 생각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대로 비난을 받아야 했죠.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를 발견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은 개인의 사생활과 함께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대두되고 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와 사회, 시민의 우선순위보다는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제주도가 자랑할 만한 ‘탁월한 시민’을 회복하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필요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이 점령군으로 오기 전에 대한민국은 시민들에 의해서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제주도는 으뜸이었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미군과 이승만,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청년단체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죠.

1947년 3.1절 발포 사건으로 경찰이 6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이자 제주도 직장인의 95%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른바 민관군 총파업이죠. 이듬해 남한 단독선거가 열리던 5월 10일은 제주도에 배정된 3석의 국회의원 중에서 2석은 단독선거를 거부하는 제주도민의 뜻으로 끝내 국회의원을 뽑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벌어질 극한의 학살로 탁월한 시민성도 함께 학살당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국의 영웅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 영웅들이 국가에 건강한 역할을 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영웅을 여럿으로 만들어서 폐해를 줄이자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지배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다수가 지배하더라도 지배자들은 법을 수호하고 시민들의 공복(公僕)이 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법률 자체도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법규는 보편적이어야 하는데, 행위는 개별적인 것”(같은 책, 102쪽)이기 떄문입니다. 법이 최고 권력이 되지 않으면 민중선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 거의 모든 국가에서 발견된 현상이었죠. 하지만 법보다 더 강한 것은 관습입니다. 사람들이 지지하고 좋아해야 법률이 유지될 수 있다고 했죠. 

결론적으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바람직한 제주의 정치는 ‘제주 시민’의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시민이란 경제적으로 말하면 중산층의 복원입니다.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가정의 경제 수준을 평균으로 올릴 수 있는 정책을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순히 재산상의 중산층을 말한 건 아닙니다. 모두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돼 있으면 그건 돈의 노예를 양산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epithymia)의 평준화를 주장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좀 더 많이 내고 좀 더 많이 베풀며 중산층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극빈자는 기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에서 배려해주는 욕구의 평준화야말로 중산층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과거처럼 강력하게 우리를 이끌어주는 리더십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오자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맞는 새로운 정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익숙해진 팔로우십(followship)입니다.

치자 고유의 탁월함은 선견지명(phrnesis)뿐이다. 다른 탁월함은 치자와 피치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 대신 피치자의 탁월함은 선견지명이 아니라 올바른 의견(doxa alethes)일 것이다. (같은 책, 144쪽)

자유민답게 지배할 줄도 알고 자유민답게 복종할 줄도 아는 사람을 탁월한 시민이라고 합니다. 제주도민이 탁월한 시민이 된다면 그 누가 제주도를 모욕할 수 있겠습니까? 제주도민이 탁월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생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철학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보겠습니다. 택시를 타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듣게 되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대체로 정치에 대한 혐오나 정치인 욕입니다. 그것은 미디어가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철학에서는 정치철학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윤리학과 정치철학이야말로 개인의 일상과 습관,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윤리학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최선의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선의 정치가 추구하는 목표와 같을 수밖에 없”(같은 책, 411쪽)기에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가장 으뜸의 학문으로 평가하는 까닭은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같은 책, 14쪽)입니다. 이렇게 가치 있는 정치 분야에 대해서 혐오하는 풍조는 제주도에서 만큼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혐오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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