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읽기] (46)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 / 김준기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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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판단력비판』이석윤 옮김. 박영사.

예술의 근저에는 감성이라는 소통 기재가 존재한다. 따라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성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감성이라는 것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서 체계적인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한 것인지 조차도 망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대 초기부터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치열하게 존재해왔고 그것으로부터 예술이라는 체제가 공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감성에 관한 체계적연 연구의 장구한 역사 속에 단연 돋보이는 선구자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그는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더불어 감성학을 이성적 인식의 대상으로 격상하여 근대 감성학/미학의 길을 열었다.

서양철학의 근간은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의 두 범주, 즉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형이상학과 윤리학, 이데아와 현상, 관념과 경험 등의 이분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칸트는 이렇듯 순수이성(Pure Reason) 과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으로 압축할 수 있는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를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는 매개로 판단력(Judgement)에 대한 비판(Critic)을 시도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인간 인식의 범주와 원리, 방법 등에 관한 학문’과 ‘2)인간 행위에 대한 체계적인 규명’에 이어서 ‘3)양자를 매개하거나 완결하는 차원의 감성 연구’를 체계화함으로써 전근대적인 관념론적 명제들을 근대적인 합리성에 입각하여 재검토하여 근대 인문과학의 새 길을 열었다. 

칸트는 3대 비판서를 통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뤘다. 그의 저서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과 함께 3대 비판서의 완결로 꼽히는 고전이다. ‘순수이성 비판’이 인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학의 범주라면, ‘실천이성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의 범주에 속한다. 이에 비해 ‘판단력 비판’은 감성이란 무엇인가? 직관이나 숭고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감성학 범주에 속한다. 판단력비판은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부터 감성에 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을 독립시켜 독자적인 학문으로 세우는 데 기여하였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완성한 저술이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은 사변적 이성에 관한 학문, 즉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선험적 원리들에 의한 인식 능력을 순수이성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자연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 수준에서 체계화 한 작업을 순수이성 비판이라고 규정했다. 비판이라는 단어가 규정하고 있듯 그는 인간이 합리적인 이성으로서 해결 가능한 문제들을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 넣고 그것을 벗어나는 문제들을 경험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로 규정했다.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들인 신의 존재, 영혼, 인간의 자율성 등의 문제들을 순수이성에서 제외시키고,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이성 그 자체, 이성의 법칙 등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으로 선험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을 세웠다.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문구는 ‘인간의 행위가 언제 어디서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윤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풀어서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은 윤리학이다. 『순수이성비판』이 ‘순수한 사변(이론) 이성의 기능’을 다뤄 선험적 인식의 원리와 범주, 한계를 규정했다면, 『실천이성비판』은 ’순수한 실천 이성의 기능‘을 다루면서 윤리적 행위의 원리와 범주, 한계를 규정했다. 실천이성비판은 ’실천이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서 경험적 원리에 입각한 이성, 즉 윤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모색했다. 

칸트는 철저한 이성주의자다. 사변적인 이성과 실천적인 이성에 이어 칸트는 심미적(審美的) 이성을 탐구했다. 그는 사유과 실천, 그리고 감각의 영역 모두에서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추구했다. 그것은 예술이나 심미적 체험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과학적 합리성과 실천적 합리성을 매개하는 영역으로 심미적 합리성을 꼽았다. 이런 맥락에서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1793)은 감성에 관한 과학이다. 칸트는 감성계와 초감성계 사이의 깊은 간극을 매개하는 차원에서 감성학을 제안한다. 칸트의 제1 비판서가 인간의 존재론과 인식론 등의 형이상학을, 제2 비판서가 윤리학을 탐구한 것이라면, 제3 비판서인 판단련 비판은 감성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해 제안한 것이다. 

“어떤 것(어떤 표상)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구별하고자 하는 경우, 우리는 그 표상을 인식하기 위해 지성을 통해 객관과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을 상상력(아마도 지성과 결합되어 있는)을 통해 주관과 주관의 쾌·불쾌의 감정에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취미판단은 인식판단이 아니며, 따라서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적 판단인 것이다. 여기에서 '감성적'이라는 것은 그 규정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표상들의 모든 관계, 심지어 감각들의 관계조차도 객관적일 수 있지만(그리고 이 경우에 관계란 경험적 표상의 실재적인 것을 의미한다), 유독 표상과 쾌·불쾌의 감정에 대한 관계만은 객관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표상과 쾌·불쾌의 감정에 대한 관계는 객관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지시하는 바가 없으며, 이 관계에 있어서 주관은 다만 표상에 의하여 자극받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칸트는 감성의 주관성을 취미판단의 특성에 관한 위의 문장으로 집약하고 있다. 취미판단은 감성적이다. 그것은 미를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이성이 아닌 마음 속 표상을 통해 쾌나 불쾌를 느끼고 쾌를 느낄 때 그것을 미(美)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그것은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가령 “미란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 속에는 감성이라는 기재는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고도 누구에게나 통용 가능한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취미판단에 대한 그의 정의 가운데는 공통감에 관한 명제는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칸트에 따르면 취미판단이 제시하는 필연성의 조건은 공통감이다. 커먼센스(common sense)다. 풀어서 말하는 ‘공유감각’ 정도. 고유의 법칙으로 규정하지 않고도 공유가능한 것이 바로 감성영역의 소통이다.

칸트가 말하는 취미판단은 선험적이라는 데 또 하나의 초점이 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탐닉이 더 깊은 아름다움에 대한 몰두를 만들어내는 이른바 심미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것은 경험 이전의 매우 선험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칸트는 또한 선험적(transzendental) 원리를 강조했다. 선험적이라 함은 경험에 앞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들을 말한다. 그것은 ‘경험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근거는 첫째 직관에서 표상들을 지각하는 종합, 둘째 상상력에서 표상들을 재생시키는 종합, 세 번째 개념에서 표상들을 재인식하는 종합 등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직관과, 상상력, 개념 등에서 표상을 지각하고, 재생하고, 재인식하는 선험적인 근거들을 통하여 경험 또는 체험이라는 심리적 기재를 작동한다. 

여기서 잠시 심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심미’에서 쓰는 ‘심’자는 ‘심오(深奧)나 심원(深原)’과 같이 ‘깊을 심(深)’ 자를 쓰는 게 아니라 ‘살피다, 심사하다, 심문하다’의 ‘살핌 심(審)’ 자를 쓴다는 점이 그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심미는 ‘深美’가 아니라 ‘審美’라는 점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심미란 ‘심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바움가르텐(Baumgarten)은 『미학(Aesthetica)』(1750-58)에서 미적 판단의 척도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미학을 정초했다. 미학(美學)은 독일어 “Ästhetik”의 번역어다. 그런데 이 번역어 속에도 함정이 있다. 문제는 “미(美)”에 있다. 잘 못된 번역어다. 숭고와 장엄, 비장과 비극, 해학과 희극 등 감성의 여러 조건들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감성에 관한 과학적 인식을 지향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학문 이름도 당연히 감성학(感性學)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는데, 번역어는 미학(美學)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테크놀로지(technology)를 기술이라고 번역하고, 아트(art)는 미술이라고 번역한 데서 오는 오류와 같이 개념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테크네(tech)와 아르스(ars) 모두 아트(art)의 어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트(art)를 예술(藝術)이 아닌 미술(美術)이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심란한 오류다. ‘에스테틱스(aesthetics)’의 어원인 아이스테시스(Aisthesis)‘는 직감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이 또한 감성과 직관, 감각에 관련한 학문을 아름다울 미(美) 자를 넣어 번역함으로서 심각한 혼돈을 초래한 경우다. 하지만 언어의 화용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 우리는 “미학”이라고 쓰고, “감성학”이라고 생각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칸트는 감성에 관한 연구를 과학의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감성적 판단력의 학문으로서의 미학/감성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이성과학과 윤리학 사이에 감성과학을 자리잡게 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 즉 자연에 대해서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제1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인간의 의지에 입각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규명한 제2 비판서 실천이성비판 양자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나눠진 학문적 개념이다. 칸트는 이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자율성 사이를 매개할 합목적성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되돌아보면 예술에 대해 다분히 보수적인 해석으로 비친다. 자연에 대한 숭고미와 인간의 자율의지가 합일하는 지점으로서의 예술이란 근대 초기에는 몰라도 지금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위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은 고전. 그가 활동했던 시대가 18세기 후반이었던 점을 십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성적 인식보다 낮은 단계에 머물렀던 감성적 인식은 바움가르텐 이래 독자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전근대 시대에도 감성에 관한 언급이나 연구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진선미(眞善美)가 상호 통용하는 가치여야 한다는 강박 아래에서의 일이었다. 참된 것, 착한 건, 아름다운 것이 하나로 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고전 미학은 딱 거기까지였다. 근대 감성학(미학)은 감성적 인식의 목표를 미(美)에 고정하지 않고 인간의 감성에 의해 포착된 감성적인 것(das Ästhetische)에 주목했다. 칸트는 선험적(先驗的)인 인식을 강조하면서도 경험적인 현상으로서의 감성적 인식을 추구함으로써 경험주의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 따라서 칸트는 아래부터의 미학이나 실험미학, 사회학적 미학, 분석미학 등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 감성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 위대한 선구자다. /김준기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 매주 월요일 아침 고정 코너인 BOOK世通 제주읽기가 필자의 사정으로 2주 동안 차질을 빚게 됐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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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관장

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과정 수료.

전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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