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25) 
19세기 만국박람회부터 2016년 인도 세계문화축제까지...목적·비전 분명히 해야

1300여년 전 당나라는 막강한 군사력과 문화적 위상을 토대로 해양과 육지 실크로드를 타고 이집트, 동아프리카까지 무역거래 지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수도 장안(오늘날 시안)의 시장은 무역의 현장이자 동서교역을 통해 문화가 혼합되는 현장이었다. 세계에서 온 물건이 거래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외국의 스님, 사신, 상인과 여행자들이 늘면서 장안의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와 같은 시장은 ‘천하사방의 진기한 보물’이 모이는 곳이라고 알려졌다. 동시가 귀족과 관료들이 찾던 곳이라면 서시는 주로 외국상인들이 거래하던 일반인을 위한 시장이었다. 수만 개의 상점에 먼 실크로드를 통해서 가지고 온 유리, 보석, 향신료 등과 같은 물건들이 펼쳐졌다.  

서시는 동서무역의 기지이기도 했지만 진기한 물건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 종교와 문화 예술 등도 유통되는 국제적인 공간이었다. 이슬람교가 들어왔고  낮에는 물건이 거래되고 밤이면 서역의 무희들이 춤을 추는 유흥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여관과 식당, 술집 등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전해졌다. 살아있는 세계문화의 현장이었다. 

1851년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서 근대식 첫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대전시(the Great Exhibition)’라고 불린 이 행사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발전을 한 자리에 모은 거대한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볼 거리였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던 앨버트 공이 후원했을 정도로 대영제국의 위상을 뽐내려던 행사로 그에 걸맞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유리와 철로 된 대형 건물 ‘크리스탈 팰리스’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건물이 얼마나 컸는지 크리스탈 팰리스 안에 나무를 즐비하게 심었고 국제전시장에는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이 소개되고 판매되었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천 명의 참가자들이 장식미술, 신기계, 가구, 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했다. 근대문물교류와 판매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려는 목적과 달리 정작 중국 등 인종이 다른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과 폄하는 피할 수가 없었다. 

1851 런던 만국박람회 크리스탈 팰리스, 출처 wikimedia.org.jpg
▲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크리스탈 팰리스 모습. 출처=wikimedia.org.

그러나 런던의 만국박람회는 이후 참여한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며 파리, 시카고 등으로 확산되어 19세기~20세기의 중요한 세계문화교류의 현장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은 1862년부터 1910년까지 36회의 세계만국박람회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일본 문화를 수출하고 서구문물을 수용했다. 한국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했으나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참여 규모도 작았고 큰 주목도 받지 못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주도권을 잡지 못했던 작은 나라의 설움이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만국박람회나 대형국제행사는 한때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나라들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유럽의 여러 제국의 수도에서 볼 수 있었던 세계문화를 보여주는 축제와 만국박람회가 중소국가들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존감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대형 문화행사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1968년 인도 뉴델리에서 시작된 인도 트리에날레, 1981년 방글라데시에서 시작한 방글라데시비엔날레 등은 그러한 예였다. 물론 미술의 사례이기는 하나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유럽의 사례에 대응하는 아시아의 미술축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서구식 모델의 이식이 아니라 정부주도로 문화지형도에서 새로운 지정학적인 위상을 차지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인도의 뉴델리에서는 '세계문화축제(World Culture Festival)'가 열려서 21세기 문화축제의 또 다른 사례를 보여주었다. 155개국에서 온 3만 7천명의 참가자들이 3일 동안 음악, 무용, 미술 등을 선보이며 ‘하나의 세계, 하나의 가족 (One World, One Family)’을 외쳤다. 네팔, 페루, 스리랑카, 몽골, 파라과이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참여하여 공통된 가치를 지향하는 ‘인류 공동체’를 표방하며 축제의 장을 만든 것이다. 주최 측은 3일 동안 무려 370만명이 이 축제를 관람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세계문화축제'는 인도에서 시작된 ‘아트 오브 리빙 재단(The Art of Living Foundation)’이라는 민간단체가 주도한 것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정신적 삶과 평온, 개인적 발전을 강조하는 일종의 영적 운동의 일환이었다.  

뉴델리의 2016 세계문화축제 현장, 출처 cdn.artofliving.org.jpg
▲ 뉴델리의 2016년 세계문화축제 현장. 출처=cdn.artofliving.org.

외국인이 자유자재로 올 수 있는 오늘날 제주는 이미 당나라 장안의 서시처럼 문화교류의 현장이 되었다. 대형마트에서 세계에서 온 와인, 과일, 음료 등이 팔리고, 중동식 카페, 베트남 음식점 등이 거리에 들어섰고, TV에는 실시간으로 여러 나라의 드라마, 오페라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세계문화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당나라, 대영제국의 시대와 달리 큰 편이 아니다. 오히려 외국인이 저지른 각종 범죄와 쓰레기 때문에 무비자 제도에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제주에 '세계섬문화축제'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누가 이 개념을 처음에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목적과 비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의 변방에 있던 지역으로서 성장의 시대를 맞아 문화정치적 역량을 과시하려는 낡은 시도의 반복인가? 동아시아의 작은 섬이 세계의 다른 섬문화와 연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인사를 초대하는 국제행사 '제주포럼'과 같은 기존의 장을 두고 반드시 수십억이 들어가는 축제라는 형식이 필요한 것인가?  인도의 '세계문화축제'처럼 민간주도로 수백만 명이 찾는 세계 평화와 개인의 행복을 도모하는 가치 확산의 장을 만들 자신이 있는가? 

 ▲필자 양은희는...

양은희-사진-2.jpg
양은희는 제주에서 태어나 초·중·고·대학을 졸업했고 영문학·미학·미술사·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과 한국에서 큐레이터와 미술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 <아방가르드>(1997), <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고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