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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3월24일자 경향신문이 1면에 제주출신 인사들의 간첩사건을 대서특필했다.
2016년 6월 대법원 재심 무죄 확정되자 형사보상 청구...故강우규 유족 10억원 배상 명령

유신정권 말기 지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제주 출신 인사들의 일본 조작간첩 사건에 대해 법원이 10억원대 국가 배상을 인정했다.

서울고등법원 제4형사부는 제주출신 故 강우규(1917년생)씨의 유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간첩조작 사건 형사보상 청구소송에 대한 인용 결과를 27일자 관보에 게재하도록 했다.

제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언론은 북괴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가짜 재일교포 사업가가 검거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당시 검거된 11명에는 故강우규(당시 61세. 서귀포 회수동), 故강용규(당시 53세. 서귀포 회수동)씨 형제와 故김추백(당시 43세. 서귀포 남원읍)씨 등 9명이 포함돼 있었다.

제주교육대학교를 설립하고 1, 2대 학장을 역임한 故김문규씨와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현오봉씨 비서 출신인 이오생(당시 43세. 서귀포 성산읍)씨도 연루됐다.

故강우규씨는 16살에 일본에 건너가 자수성가했다. 45년만인 1977년 귀국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재일교포 사업가로 위장했다며 간첩 혐의를 씌웠다.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한 강씨는 중앙정보부의 강요대로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고 진술했다.

함께 연루된 인사들도 강씨와 함께 간첩활동에 따른 활동비 등을 제공받았다며 거짓 진술을 해야 했다. 결국 법원은 1977년 6월 강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78년 3월2일 대법원은 강씨에 대해 사형판결을 확정했다. 반면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1년간 옥살이를 한 강씨는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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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3월24일자 경향신문 7면에 이어진 제주출신 인사들의 간첩사건 기사내용.
강씨의 동생 등도 200여일 동안 고문을 받은 후 항소심에서 형량이 감형돼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故김문규 학장의 경우 풀려난 후 후유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강씨는 2007년 4월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동생도 4년후인 2011년 4월 숨을 거뒀다. 

피해자들의 유족들은 2010년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자 곧바로 법원에 재심청구를 했다.

2014년 12월 서울고법 형사6부(김상환 부장판사)는 재심에서 故강우규씨 등 6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했지만 2016년 6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당하는 과정에서 한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며 “강씨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거나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대법 확정판결에 따라 2016년 8월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법은 구금의 종류와 기간, 정신적 고통, 신체 손상 등을 고려해 故강우규씨의 유족에게 10억4560만원월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변호사 비용 400만원도 국가가 배상하도록 했다.

故김추백씨의 유족에게는 1억9947만원과 변호사 비용 400만원, 강씨의 동생과 현오봉씨 비서 출신인 이오생씨에는 각각 6150만원과 변호사비용 400만원을 배상하도록 했다.

형사보상 대상자 6명 중 생존자는 제주출신 이오생(83.서귀포시 성산읍)씨와 이근만(80. 서귀포시 중문), 김성기(82.강원도)씨 3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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