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24) 봄동과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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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념에 무친 봄동과 동지. ⓒ 김정숙

다시 봄이다. 꽃을 먹는 봄이다. 하루걸러 성애가 내리고 하루걸러 광기어린 바람 불면서 멈칫멈칫 오는 봄. 이제 발자국소리 가까이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달함에 부쳐서 봄동은 부지런히 꽃대를 올려 세우고 있다. 봄동은 잎이 결구형태를 취하지 않고 노지에서 월동하는 배추를 말한다. 제주에서는 ‘퍼대기’라고도 한다.

우리는 배추를 뿌리째 캐서 먹지 않았다. 속잎을 키우면서 돌아가며 겉잎만 뜯어 먹었다. 몇 포기 안 되는 퍼대기배추로도 긴 겨울 초록밥상을 차려내는 비결이었다. 눈바람 맞으면서 겨울을 나는 일명 ‘눈 맞은 배추’는 달다.

봄동은 점점 맛이 좋아지다가 봄 발자국에 맞춰 동지를 세운다. 동지는 배추나 유채, 무가 세운 어린 꽃 대궁을 말한다. 연녹색 꽃봉오리를 와자자 물고 나오는 통통한 대궁은 생으로 먹어도 달다. 특히 유채동지는 길고 더 달다. 가을에 심어 겨울을 나는 봄동은 벌레들도 얼씬거리지 못해 그야말로 청정이다.

밭담너머로 손을 뻗어 잡히는 데로 동지를 꺾어 먹었다. 띄엄띄엄 붙은 잎을 떼어내고 아작아작 소리 내며 먹었다. 유채꽃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가졌음직한 추억이다. 제주사람들은 봄동보다 동지를 더 사랑한다. 꽃 맛을 아는 거다. 동지는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짧아서인지 크게 상업적이지는 못하다.

아침엔 된장국, 점심엔 쌈, 저녁엔 나물, 겉절이... 김장김치가 물릴 때 쯤 맛보는 동지김치는 밥도둑을 넘본다. 봄동이나 동지는 재료 자체가 가지는 맛이 달고 신선해서 맛내기 위한 재료가 별로 필요치 않다. 된장과 참기름이나 들기름, 마늘, 고춧가루 등 흔한 전통 양념들과 잘 어우러진다.

내 손으로 배추를 키우면서 알았다. 봄동은 끊임없이 속잎을 내면서 겨울을 살고 동지를 세운다. 꽃대를 세우도록 어머니는 겉잎만 뜯으셨던 것이다. 동지를 꺾고 나면 곁가지가 여러 개 나온다. 곁가지는 약하지만 텃밭가득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텃밭에 넉넉하게 봄동을 심었다. 달라고 하는 이들이 있어 가져가라고 했다. 뿌리째 캐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잎을 뜯어 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속잎만 추려서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 시장에 나오는 봄동이 포기로 캐서 나오니까 뿌리째 캐는 것이다. 시장에 나온 상품이 견본이니까. 동지를 세워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겉잎을 뜯을 것이다. 나물하나 키워 먹는 데도 지혜가 있다는 걸 또 배운다.

모든 게 시장이 기준 되는 세상, 광고로 배워가는 세상, 상품만 추구하는 세상. 우리 텃밭 퍼대기 배추는 꽃대 세우느라 바쁘다.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나풀거릴 봄날을 기다리며.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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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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