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주 칼럼] 3.8 세계여성의날, “바닥난 우물에선 행복을 길어 올릴수 없어” 
 
“어머, 결혼하셨어요? 독신인줄 알았는데...” 
내가 결혼해서 대학생이 된 딸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결혼 생활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날라리 엄마’로 요약된다.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줄곧 사회생활을 해야 했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수퍼우먼이 아닌 날라리 엄마’다. ‘수퍼우먼으로 살면 내가 먼저 지칠 터이고, 내가 지치면 가족에게도 잘해줄 수 없으니 차라리 날라리가 되어 내가 행복해지고 그 행복을 가족에게 나눠주자’는 생각이었다. 

일 중독자에 가까운 나는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일을 우선 순위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일을 우선 순위에 둘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출산 1주일을 앞두고 애를 키워줄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최후통첩(?)을 듣고도 나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여자가 출산 양육 기간 동안 일을 쉬게 되면 경력이 단절돼 사회로 재진입하기 어려우니,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을 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시어머니는 ‘백일까지만, 돌까지만,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하면서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양육을 맡아주셨다. 

덕분에 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과 걸음마를 처음 떼던 날, 글자를 읽어내는 첫 순간을 마주하는 기쁨을 시어머니에게 양보해야 했다. 주중에는 시댁에, 주말에만 집에 오는 아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애를 부모가 끼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그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함께 지냈는데, 방과 후가 늘 문제였다. 나는 일하는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학원으로 ‘돌리거나’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았다. 내 가까운 선후배치고 딸아이와 놀아준 경험이 없는 이가 별로 없다. 덕분에 딸아이는 ‘사회적 이모’를 누구보다 많이 얻었다. 딸아이는 간식도 혼자 챙겨 먹어야 할 때가 많았다. 냉동실에 만두나 찐빵을 쟁여 놓고, 아이가 배고프다 전화하면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으라’고 코치했다. 오죽하면 같이 일하던 후배들이 딸아이 별명을 ‘찐빵 소녀’라고 붙였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딸아이는 찐빵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을 다룰 줄 모르는 딸아이가 그나마 챙겨먹을 수 있던 간식은 냉동식품밖에 없었던 탓에, 나는 딸아이가 좋아하지도 않는 간식으로 ‘면피’를 했던 것이다. 

더 큰 골치는 방학이었다. 하루종일 학원으로 돌릴 수도 없고, 친적 집에 맡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먹이고 재워주는 캠프나 서당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첫 캠프를 보냈을 때였다. 캠프를 보내기 전날도 바빴던 나는 전화를 해서 아이 스스로 짐을 꾸리게 했다. 혼자서 짐을 싸서 캠프를 떠났던 아이가 돌아와서 한 첫 마디. “엄마는 왜 잠옷 싸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어? 다른 언니들은 전부 잠옷을 갖고 왔는데, 나만 티셔츠 입고 잤잖아. 너무 창피했어.” 그 사건 이후 딸아이는 엄마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어디를 가든 혼자서 짐을 꾸렸다. 그 덕에 딸아이는 제한된 가방 안에 필요한 짐을 차곡차곡 각 잡아가며 쌓는 기술이 탁월해졌다. 

날라리 엄마 덕에 딸아이는 방목을 당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었다. 또래들보다 일찍 부모로부터 독립했고,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고 관리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딸아이는 농담 삼아 ‘엄마가 날 키워준 건 고작 3년이나 되려나?’하며 엄마를 놀리지만,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제 막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애는 방목해야 더 잘 큰다’고 주장한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내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 자식 간 물리적 시간공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있을 때 잘하고, 없을 때 믿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옆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언제나 사랑하고 믿고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확인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는 농작물처럼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믿음만 있으면 잘 자란다. 그렇게 아이에게, 가족에게 늘 사랑과 믿음을 듬뿍 주려면 나부터, 엄마부터 행복해야 한다. 바닥 난 우물처럼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아이에게 가족에게 퍼 줄 사랑과 믿음을 어디서 길어 올리겠는가.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날라리로 살더라도, 행복한 엄마의 삶이 가족들의 행복한 삶을 만드는 필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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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은주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무국장 ⓒ제주의소리 
안은주는?

충남 천안에서 유년과 사춘기를 보내고, 서울에서 20여년을 살았다. 기자가 천직인줄 알고 15년동안 기자 생활을 하다 제주로 이민. 제주가 좋아, 올레가 좋아 9년 전부터 제주에 살면서 현재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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