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3) 돼지 팔아 한 냥, 개 팔아 닷 돈 하니 양반인가?
 
한마디로 양반을 업신여겨 비웃는 말이다.
 
양반과 관련해 재미있는 고대소설이 한 편 있다. 영·정조 때 실학자요,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兩班傳)'.

간략히 소개한다.
  
"옛날 강원도 정선 땅에 한 가난한 양반이 있었는데, 그는 현명하고 정직하며 글 읽기를 즐기고 사람 접대를 잘하며 신임 군수에게 인사치레 잘하는 인물이었다. 

한데 생활능력이 없어 관가에서 쌀을 빌려 먹으며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환자(還子, 관가에서 봄에 타다 먹고 가을 추수기에 갚기로 한 곡물) 어느새 1000석이나 되어 갚을 길이 없게 되자, 마침내 관찰사가 투옥 명령을 내렸다. 

군수가 난감해 망설일 때, 이웃에 지체 낮은 부자가 그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양반의 신분을 샀다. 한숨 돌린 군수가 증인이 되어 양반문서를 만들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온갖 형식적인 행동 절차들이 기록돼 있었다."
  
일부를 간추리면, 

"양반은 새벽 네 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눈은 콧날 끝을 슬며시 내려다보고 무릎을 꿇고서 얼음 위에 표주박을 굴리듯이 글을 술술 막힘없이 외워야 한다.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하고 추운 것도 견뎌내야 하며 입으로 가난하다는 말을 뱉지 말아야 한다.…하인을 부를 때는 긴 목소리로 부르며, 길을 걸을 때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 법이다.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도 의관을 정중히 쓰고 먹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법도가 있다. 국물을 먼저 먹지 말며, 물을 마실 때도 넘어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수저를 올릴 때도 소리를 내선 안되며, 냄새 나는 생파를 먹지 말아야 한다.

술을 마실 때는 수염을 적시지 말며, 속이 상해도 아내를 때리지 말며, 화가 난다고 그릇을 집어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아이를 때리지 말며, 종을 꾸짖을 때도 ‘죽일 놈’이라고 상스러운 욕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춥더라도 화로에 손을 쪼이지 말며, 말할 때는 침이 튀지 않도록 하며, 소를 잡아먹지 말아야 하고, 돈 놓고 돈 먹기(노름)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이와 같은 여러 행실이 양반과 어긋남이 있을 시는 이 증서를 가지고 관가에 가 재판을 받을 지어다."

한국판 유머(골계)의 진수를 보여 준다.
  
군수의 말을 듣고 있던 그 부자, 그만 질겁해서 "아이고, 군수님, 이건 너무 맹랑합니다. 저를 도적놈으로 만들 셈이란 말입니까?"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한 평생 다시는 ‘양반’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군수가 일부러 '상인이 양반이 돼 지켜야 할 것만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것'만을 양반 증서에 기재한 것. 결국 같은 양반 계층인 군수가 기지(機智)를 써서 양반을 사고팔고 한 행위를 파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야기 가운데, 주인공의 부인이 가슴 쓸어내리며 한탄한 대목은 양반의 속내를 실토한 것으로 실감이 난다.

"당신이 평소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관곡(官穀, 관청에서 꿔다 먹어 바쳐야 할 곡물)에는 소용이 없구려. 어이고 양반(兩班), ‘양반’(兩半, 한 냥의 半)은 커녕 단돈 한 푼 어치도 안되는구려!"
  
'양반전'은 조선 후기, 양반 계층의 허위와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한 국문학사상 대표적인 고대소설이다. 시대사조인 실학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돼지 팔아 한 냥, 개 팔아 닷 돈 하니 양반인가?"

이 말을 '兩半인가, 두 냥 반인가?'라거나, '개 팔아 두 냥 반'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쯤 되고 보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위세 부리던 '양반(兩班)'의 체신이 말이 아니다. 그놈의 양반이 그만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옛날 우리 제주 사람들도 세태의 흐름에 날 선 눈을 가지고 있었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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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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