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올레서 만난 제주] ② 오루레에 대한 작은 염려 / 오한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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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슈오루레. 부디 이 원시적인 자연의 길들이 인간과 자본의 욕심에 훼손되지 않기를.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오루레 핑클

규슈올레 18코스로 개장된 이즈미 코스의 산길은 가팔랐지만 그래도 아스팔트를 걷는 것에 비하면 자연의 길이라 좋았다. 산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는데 치유의 폭포라고 적혀 있었다. 서귀포의 천지연 폭포가 보면 ‘아가, 조심해서 내려가라’고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무슨 치유의 기적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직 스토리텔링 까지는 안된, 어린 올레의 갈 길이 멀구나. 

산길을 내려와 한적한 길을 한참 걸어 마을 안에 들어섰는데 앞서 걷는 사람들이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집에 도착하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너른 마당, 열린 대문, 한상 떡 벌어지게 펼쳐진 음식들,  해산물과 여러 가지 채소로 만들어낸 형형색색의 음식들은 까마득하게 갇혀있었던 내 속의 침샘을 자극했다. 친환경이나 유기농 마크 없이도 ‘원조 건강음식’이 오감으로 인증 되는 순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것이다. 

“도죠, 도죠”
어서 먹으라고 권하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제주 올레길에서 만나던 마을 삼촌들과 다르지 않았다. 돌담너머로 귤을 쥐어주고, 쉰다리 한사발로 여름날의 올레길을 위로해주던 그 마음씨, 인심은 곳간에서만 나는 건 줄  알았더니, 길에서도 인심이 대박 나는구나. 

마당 너머 부엌 쪽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손을 흔드는 할머니들, 차린 것도 모자라 쉼없이 음식을 만들어내시면서 거저먹는 나그네들에게 어서 먹으라고 손짓으로 권하는 그 모습은 영화 ‘집으로’에서 보았던 산골 외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지금 저들의 가슴속에는 도대체 어떤 샘물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미식회에 온 듯, 천상의 맛을 음미하는데 등뒤에서 “와아아아아” 난데 없는 환호성이 터진다. 여성 삼인조, 서로 맞춘 듯 차려입은 귀여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악세사리가 풍성한 배낭, 올레축제에 흔히 있는 공연이 여기서도 펼쳐지나 보다, 했더니 아니었다.
“오루레 핑클이무니다”

인심은 곳간에서만 나는 게 아니었다. 오루레길에서도 대박 인심이 나고 있었다.jpg
▲ 인심은 곳간에서만 나는 게 아니었다. 오루레길에서도 대박 인심이 나고 있었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우리나라 걸그룹 원조격인 핑클과 같은 또래의 한류 팬인 듯 했다. 규슈올레를 완주한 오루레 마스코트로, 규슈올레를 걸었던 우리나라 올레꾼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였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과 오랜 동무인냥 호들갑스레 인사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치즈, 기무치’를 연발하며 10대 소녀처럼 까르르 까르르, 재미있어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에 웃음꽃이 피면서 공연 없이도 공연이 끝난 직후같은 분위기가 어느새 마당을 가득 채웠다. 

이들에게는 오루레가 해방공간이리라. 조용하기로 유명한 일본여자들 속에서, 이들의 활기탱천한 에너지는 얼마나 가위눌려 있었을까. 마음껏 자신의 흥과 에너지를 발산해도 흉은 커녕 오히려 사랑받는 이 경험이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행복일 것인가.

비가 많이 오는 나라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일광욕을 하듯, 오루레 핑클은 길에서,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길동무들 속에서 이렇게 ‘볕’을 담뿍 축적하는 것일 게다. 이 맛에 규슈오루레 17개 코스를 완주하고 새로운 오루레의 개장에 환호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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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는 방학이었지만 선생님들이 나와 이렇게 오루레를 방문한 이들을 환영했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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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하늘과 넓은 들, 탁 트인 전망은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준 공평한 선물이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지금은 조용히 길을 걷는 이 마을 사람들 속에서도 장차 오루레 몇 코스를 더 걷다보면 이 보다 더 요란한 핑클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해도 배낭에 배지를 모르고 완주를 목표로 자신의 주말을 계획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생겨날 것이다. 올레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쩌면 이 동네로 이사오는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르지. 

그러나 제발 자연이 훼손되지는 않길. 오래전에 우리나라의 어느 신문기자가 ‘이곳만은 지키자’는 칼럼을 써서 비경의 오지를 소개했는데 그 기사로 인해 비경이 사라지는 모순에 칼럼을 중단했다. 사실 그 비경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등기부 상 소유주가 누구냐와 다른 차원에서 자연의 공간은 모두의 것이다. 거기 나무를 베고 빌딩을 세워 바다를 가리고 하늘을 막을 권리를 나무가, 바다가, 하늘이 주었겠는가?  

하늘과 바다는 가려져도 그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차치하더라도, 인간보다 더 오래된 지구의 선배이자 인간보다 더 오래사는 지구촌의 연장자인 나무를 무참히 베는 일만은 어떻게든 당장 막아 낼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걷다보면 살면서 반드시 찾아내야 할 길이 이렇게 하나씩 나타난다. 밤이 되면 별이 보이듯, 길에 나서면 잃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 오한숙희 <3편 15일 이어집니다>

오한숙희는? 195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딸들에게 희망을>, <그래, 수다로 풀자>, <부부? 살어? 말어?>, <사는 게 참 좋다> 등을 펴냈다. 

여성학자이면서 방송인, 에세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 서귀포로 이주한 지 3년차다. 제주문화방송 TV <스토리 공감>을 진행하고 있으며 제주도 양성평등위원. 서귀포다움을 위한 건축포럼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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