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6)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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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블레즈 파스칼 (지은이) | 김형길 (옮긴이)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05-20 | 원제 Pensees

박근혜 탄핵의 뼈아픈 대목

박근혜, 최순실(최서원)이라는 이름이 아주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달궜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첫 번째 대국민사과를 한 게 작년 10월 25일이니 무려 6개월 동안 전 국민이 최순실 이야기를 한 셈이죠. 이렇게 거대 이슈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장악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유되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들이 묻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영화를 이겼다”는 영화배우 이병헌(내부자들)의 청룡영화제 수상소감처럼 우리의 정치가 정치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다면 그만큼 현실감각은 약해지니까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뼈아픈 대목은 ‘보수의 궤멸’입니다. 민주정치에서 선거가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주요한 근거는 서로 반대되는 진영 간의 팽팽한 긴장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마트가 하나밖에 없어서 가격이 비싼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권의 후보만 넘쳐나고 보수 정당의 후보는 먼지처럼 미미하다면 국민들은 정치 독과점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것입니다.  정치교체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좌우를 희석시키면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신분과 계급이 엄존하는 우리 현실에서 유권자는 마음 둘 곳을 점점 찾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정치는 불만을 조직하는 일이다”라는 오래된 정치 금언은 인간과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나서 한 말입니다. 다수에 영합하고 다수를 선동하는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반(反)정치가 만연하여 정치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자신감, 특히 이성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횃불처럼 타오르던 시대에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블레즈 파스칼. 앞서 이야기 나눈 스피노자(1632~1677)보다 9년 앞선 1623년에 태어나 1662년에 세상을 떠난 천재 철학자이자 과학자죠.

두 사람 모두 데카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근대적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근대에 발전한 수학(기하학)을 윤리학에 응용했지만, 파스칼은 미적분의 발견과 계산기의 발명 등 근대수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의아하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성서가 없다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본성과 자신의 본성 속에서 어둠과 혼란만을 보게 될 뿐이다. (팡세36*)
- 파스칼, <팡세>36 *2010.10.5.(전정판1쇄)

은총의 대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신앙과 인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결정론, 예정설, 원죄론, 종교적 운명론이 근대적 사고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반감이 치솟던 시절.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신학논쟁, 즉 프로벵시알(Provincial) 싸움이 격화됐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이성 능력보다는 무능력을 강조하고 신앙의 편에 손을 들어주며 싸움에 끼어들었고, 당시의 사고를 반영했던 예수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겼습니다. 당시 종교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파스칼은 보수의 대표주자였다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를 한다면 파스칼처럼

얼핏 보면 파스칼은 시대의 반동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근대수학의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신앙으로 귀의했다고 하면 의아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우리들이 읽었던 여러 과학자들의 책들을 보면 ‘신(神)’에 대한 암시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란시스 베이컨은 “최고의 지성은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신에게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죠. 파스칼의 의견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까닭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맹목과 비참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전 우주가 침묵하고 있고, 인간은 누가 자기를 거기에 놓아두었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서 거기에 오게 되었는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우주의 한 구석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지혜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 내맡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치 잠을 자다가 인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섬에 실려 와서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공포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도 비참한 상태를 보고서도 전혀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인지 놀라움을 느낀다. - 팡세 229

파스칼은 대표적인 모럴리스트(moralist)였습니다. 모럴리스트란 16세기부터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인간성과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탐구하여 이것을 수필이나 단편적인 글로 표현한 문필가를 이르는 말로 몽테뉴, 파스칼, 라로슈푸코, 라브뤼예르 등이 이에 속하죠. 위 글은 <팡세>의 머리말로 보아도 좋을 만큼 파스칼이 호교론(護敎論)을 쓰려고 했던 동기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비참하며, 스스로 비참함을 알고 있기에 위대하다는 말.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말. 비참함을 비난하거나 이를 피하기 위해서 시간을 죽이는 오락거리나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한숨. 파스칼이 한국사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파스칼은 수학의 천재답게 수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그리고 발 아래,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무수한 수(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도 그 수를 닮아가고 있죠. 그것은 무한(無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有限)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세계를 자신의 유한한 사고로 재단하려고 합니다. 한쪽은 세계가 홀수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짝수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격하게 싸웁니다. 파스칼의 눈으로 보면 오류일 뿐이죠.

진실은 상식 너머에 있습니다. 상식에 있지도 않고 다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근대인이 인간의 이성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파스칼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도박일 뿐입니다. 비참함과 비열한 감정, 공포는 자연적인 감정들이며 이성을 쉽사리 제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당대인들이 놓친 것을 짚어내고 있었기에 ‘위대한 이의제기’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세를 이룰 만큼 기세가 비등한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외롭게 지키고, 스스로 토양이 되어 미래의 중요한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게 파스칼의 주장입니다. 상식과 대세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오류를 짚은 논어와 파스칼의 구절을 보겠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3년 동안 학문을 계속하면서도, 봉급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 논어, 태백 편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발견된다. 하나는 그의 목적에 의해서. 그 경우에는 인간은 위대하고 비길 데 없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다수에 의해서.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의 경주를 보거나 다수에 의해서 말이나 개의 본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 경우에는 인간은 비열하고 비천하다. - <팡세> 160

지식인, 교양인, 독서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흘린 것을 줍는 사람입니다. 인간과 세계, 사회와 정치, 자연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시류에 영합하기보다는 외롭게 견뎌내며 쓰러져가는 기둥뿌리를 부여잡고 있어야 합니다.

시류에 휩쓸리는 순간 모두가 다시 지옥 같은 쳇바퀴를 돌아야 하고, 이를 되돌리려고 할 때는 이미 호미로도 가래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문제덩어리는 커질 것입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모 대선 후보 캠프에 교수 및 정책전문가 1000명 등 전문가만 1500명이 참여하고 있고 그 수는 매일 늘어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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