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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부부 현택훈(오른쪽)·김신숙 씨는 4월1일부터 제주시 아라동에서 시 전문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한다. ⓒ제주의소리
시인부부 현택훈·김신숙, 아라동에 시 전문 ‘시옷서점’ 4월1일 오픈 "거짓말 같은 현실 만들고파"

‘자연이나 인생에 대해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

네이버 국어사전은 시(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기원전 고대 시절부터 있던 시는 개인의 고민과 시대의 아픔까지 어루만지는 보석 같은 글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화하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 시는 점점 읽혀지지 않는 글이 되어가고 있다. 소설, 수필 같은 다른 문학과 비교해도 그렇고, 자기 개발서와 인문서가 서점 상당 부분을 차지한 근래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 속에 오로지 시집과 시 관련 서적을 취급하는 ‘시 전문서점’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서점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시인부부’ 현택훈(44)·김신숙(39) 씨가 제주시 아라동에 차린 ‘시옷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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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옷서점은 일~수요일 야간에 운영되는 시 전문서점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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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옷서점은 제주시 인다13길 45-4에 위치해 있다. 건물 1층에 있는 시옷서점. ⓒ제주의소리

탁한 하늘 사이로 봄 햇볕이 내리쬐는 3월 28일 오전 10시 10분, 제주대학교 병원 맞은 편 아라동 주택가로 향했다. 새주소 제주시 인다13길 45-4. 새로 짓는 주택만 가득한 이곳에 어색한 듯 시옷서점이 있다. 아직 간판도 달지 않았고, 주차장 안쪽에 위치해 있어 한 눈에 띄지 않는 10평(33㎡) 남짓한 1층 공간은 현택훈, 김신숙 시인이 4월 1일(오후 7시)부터 운영할 시 전문서점이다. 

앞서 서점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표현이다. 분명 예전처럼 동네 마다 하나씩 있던 서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제주도 구석구석에 낯선 서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라이킷, 책밭서점, 딜다책방, 만춘서점, 소심한책방 등 일명 ‘독립서점’으로 불리는 장소는 어느새 제주에 10곳 넘게 자리 잡았다. 기존 책방에서는 만날 수 없는 소소한 책이나 인쇄물(독립출판)을 주로 판매하며, 적지만 충성도 높은 고객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현·김 부부 역시 시옷서점을 만들기 전, 제주와 서울의 독립서점을 돌아보는 시장조사 작업을 가졌다. 결론은 예상했듯이 ‘힘들다’였다.

현 시인은 “제주에서 잘 되는 독립서점은 한 두 군데에 불과했다. 그런데 잘 된다는 기준이 한 달에 80만~90만원 남기는 수준이다. 이런저런 고정 지출이 빠지면 사실상 남기는 건 전혀 없는 셈이다. 그나마 괜찮다는 곳이 이 정도인데...아마 시옷서점도 힘들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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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택훈, 김신숙 시인의 시 전문서점 '시옷서점'의 간판 디자인. 제공=현택훈. ⓒ제주의소리
각각 2007년, 2012년 등단한 현택훈, 김신숙 시인의 본업은 따로 있다. 학원,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글과 논술을 가르친다. 당연히 장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장사 중에서 돈벌이 안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책장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즐거움'이다. 삶에서 책과 시를 뗄 수 없는 이들은 예전부터 시 시점을 꿈꿨고, 장소를 물색하다 이번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현 시인은 “다른 독립서점들도 문을 여는 가장 큰 이유가 ‘그냥 좋아서’다. 이건 서점 주인과 방문하는 사람 모두 느끼는 만족감이다. 특정 분야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다양성”이라며 “독립서점은 누구나 책을 내고 판매하는 독립출판 문화와 연결된다. 시장, 유통 같은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독특한 정서를 공유하는 공감대가 독립 출판-서점이 핵심이다. ‘이 책이 여기에 있구나’라는 작은 기쁨을 느끼고 주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그토록 바라던 일인 만큼, 시인의 표정에는 걱정보다 기대가 커 보였다. 지역 출판사 전용 코너, 이달의 시집 선정, 베스트셀러 시집, 철학을 좋아하는 김신숙 시인의 취향을 반영한 철학 코너, 문예지 정기 구독 접수, 필사노트 비치, 낭독회를 비롯한 각종 모임, 새로운 독립출판사 운영 등 하고 싶은 일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베스트셀러 시집도 정하려고 한다. 아마 두 권, 세 권만 팔리면 1등을 할 것 같고 그 뒤로는 공동 순위가 되지 않을까.” 

아이러니함이 듬뿍 묻어있는 농담 같은 진담이 일면 서글펐지만,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자신이 행복해 하는 일에 몰두하는 표정은 참으로 밝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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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택훈 시인 뒤로 옛 시집이 보인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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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감귤상자를 재활용한 책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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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옷서점 내부 모습.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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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귤상자 책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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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옷서점 모습. ⓒ제주의소리

김 시인은 “둘이 가게를 내본 적도 처음이고 건물을 임대해, 사업자 신고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 의견이 충돌하면서 당연히 부부싸움도 하게 됐다. 그럴 때 ‘서점은 우리가 재미있으려고 한 것인데 싸우지 말자’고 이야기 한 뒤로는 다투는 횟수가 줄었다”고 즐겁게 말한다.

물론 입에 풀칠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문 여는 날짜는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로 한정한다. 시 전문서점에 야간서점이라는 또 하나의 독특한 개성이 더해진 셈이다. 문 여는 날을 굳이 만우절(4월 1일)로 잡은 것은 만우절처럼 '거짓말 같은 현실'을 만들고 싶어서란다.

현 시인은 “대구에 ‘시인보호구역’이란 시 독립서점이 있다. 운영자가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는데 ‘오늘 역시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쓸쓸한 내용의 글을 종종 올린다. 그런 걸 보면 ‘진짜 (장사가) 안되는구나’라는 실감도 든다. 물질적 이익은 없겠지만 더 큰 만족감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철없는 젊은 시인 부부의 도전은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함께 한다.

동료작가이면서 건물주인 오광석 씨가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내줬고, 안민승 화가는 간판 디자인을 만들었다. 펜션을 운영하는 지인은 블라인드를 달아줬다. '소설은 읽고, 시는 입는다'는 멋진 서점 대표 문구는 김신숙 시인의 작품이다. 현·김 시인이 맨 땅에 머리 박는 시도를 마냥 겁내지 않는 이유는, 즐거움도 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옷서점은 시집, 동시집, 시인의 산문집, 비평집, 동인지 같은 시와 관련된 모든 책을 다룬다. 한 쪽 면은 새 책, 반대쪽은 헌 책이 비치돼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국과 제주를 아우르는 다양한 시를 만날 수 있다. 

책방 주인과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시집이 빽빽이 꽂혀있는 책장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박목월의 《나그네》, 조지훈의 《승무》, 김소월의 《진달래 꽃》, 류시화의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익숙한 시집이 하나 둘 눈에 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있던 시, 한때 크게 유행했지만 지금은 쪼그라든 SNS, 싸이월드에서 자주 보던 시집이다. 내 의지만으로 시를 읽어본지가 언제인지 문득 생각해보니,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시를 읽는 사람을 위해 책을 추천해달라고 주인에게 권하자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윤성택의 《리트머스》를 꺼내줬다.

현 시인은 “많이 알려진 시인은 아니지만, 윤성택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나 시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추천한다. 책값 8000원을 지불하고 개장도 안한 서점의 첫 번째 손님이 됐다. 

“시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시적(詩的)이라는 느낌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한다. 시적인 드라마, 시적인 음악, 시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처럼 시적인 느낌이 무엇인지는 대부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시옷서점은 그런 ‘느낌’을 공유하며 시를 만나는 공간이 되고 싶다.” 

시를 사랑하고 시에 관심있고, (자신은 모르지만) 시가 필요한 제주도민과 함께 하고 싶은 현택훈, 김신숙 시인의 당부다.

시옷서점
제주시 인다13길 45-4
일~수요일, 오후 7~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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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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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함께 시와 관련한 서적, 소품도 판매한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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