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6) 남의 켠 불에 게 잡기
*기 : 바다에 나는 게. 제주방언으로 ’깅이, 겡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蟹(해)‘다.  

한밤중에 바다에 나가 게를 잡으려면, 횃불을 밝혀 게를 유인하는 게 상책이다. 어선이 야간 조업에 집어등(유어등)을 대낮처럼 켜 고기를 불러 모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록 미물이라 하나 다짜고짜 되는 일이 아니다. 마구잡이식으로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이다. 그러니까 게를 잡는 것도 지혜 다툼이다.
  
횃불을 쳐들고 바위틈에 앉아 게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제대로 하는 식은, 바위 언저리에 막을 쳐 불을 밝혀 두고 고것들이 떼 지어 몰려오도록 하는 것이다. 기둥 노릇할 굵직한 막대기 몇 개와 그 둘레를 두를 천 같은 기본 설비가 있어야 한다. 갈대나 싸리 따위를 묶어 홰를 만드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게를 잡으려는 자가 남의 불로 잡는다 함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얌체 짓이다. 그러니까 이 속담은 자기 일을 하면서 제 것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말이다. 
  
'놈 싼 홰에 보말 잡듯'이라 하는 제주 속담도 같은 뜻이다. '보말'은 '보말고동'의 제주방언이다. 남의 물건을 소비해 제 일을 할 뿐 아니라, 거기서 난 이익을 혼자 갖는다는 것이니 될 법한 일인가.
  
비슷한 경우를 에둘러 하는 말도 있다.
'놈의 우로 내 넘젠 허염져.'(남의 위로 내를 넘으려 한다.) 

내를 건너려면 그게 크든 작든 잠방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뒤, 돌로 다리는 놓아 가며 건너야 한다. 간밤에 물이라도 불어 콸콸 넘쳐 물살이 급할라 치면 아슬아슬한 일이다. 하물며 그런 내를 ‘남의 위’로 넘으려 하다니 될 법한 노릇인가 말이다. 도대체 경우가 아니다.
  
칠석날, 인간세상의 까막까치(까마귀와 까치)란 놈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 은하수에 다리(오작교. 烏鵲橋)를 놓아 주면, 견우 직녀성이 그 다리를 건너 만난단다. 일 년 일도(一度), 오매불망, 일 년을 애타게 기다리다 만난다 한다. 오죽 애틋했으면 까막까치가 머리를 맞대어 다리를 놓아 줄까. 감응했을 테다. 두 연인의 만남이 하도 애절한 터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니, 칠월칠석에 하늘이 비를 뿌린다고 한다. 전설이지만, 무심히 날아다니는 새에게도 지각이 있고 감성이 있는 게 아닌가. 
  
‘남의 위로 내 넘는’ 것은 까막까치가 헌신적으로 놓아 주는 그런 다리가 아니다. 의당히 제 힘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남의 힘을 빌려 한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의타심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습관 이전, 천성이 그러한 자, 혹은 정체성도 주체성도 없는 자라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속담으로 경계하려 한 것일 테다. 이를테면 '남의 팔매에 밤 줍는다'고 한다. 밤을 떨어뜨려 주우려고 팔매질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밤은 자기가 먼저 줍는다는 말이니, 이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경우라니. 그래서 이런 자를 낯가죽이 두껍다 해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 손가락질하는 것 아닌가. 

이것도 분명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다. 한세상 살면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제 분(分)을 알고 사람의 정도(正道)를 걷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취할 행위가 못 된다.
  
요즘 대선 정국에 ‘감나무론’이란 게 입에 오르내린다. 한 정당의 후보경선에서 2위 하던 후보가 결선에 나가지 못할 때, 그 표가 다른 당 후보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빗댐이다. 다 익은 감이 떨어지듯 당연히 예정된 수순이라는 것이다. ‘남의 켠 불에 게 잡는다’와 일맥 통할까. 일부러 남에게 의지하려 하는 것은 아니나 덕을 보게 되는 거라, 유사한 점이 있어 보인다.

육지(표준어권)에서 쓰이는 같은 속담들이 여럿 있다.
⧍남의 불에 게 잡는다
⧍남의 떡에 설 쇤다
⧍남의 바지 입고 새(띠) 벤다
⧍남의 바지 입고 춤추기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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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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