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서영표 제주대 교수...제주에 적합한 관광 패러다임이란?

최근 몇 년 동안 제주는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외자 유치와 인구 유입, 관광객 1500만 시대 진입 등. 이로 인해 제주는 일찍이 겪어본 적 없던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쓰레기, 오폐수, 교통, 부동산폭등, 난개발, 환경파괴까지. 급기야 제주가 이대로 가도 되겠느냐는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에 주목해온 서영표 제주대 교수에게 제주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얘기를 듣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3) 과연 ‘제주다움’은 무엇인가
(4) ‘지속가능한 제주 발전계획’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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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일출봉에 몰린 관광객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관광’이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제주에선 어떻게 작용해왔는가?

앞에서 대중적 관광, 낭만적 관광, 탈근대적 관광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여행이 소위 대중까지 향유할 수 있는 여가로 발전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구별짓기’를 원했던 중간계급 사람들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앞세운 낭만적 관광을 선택했다. 그리고 탈근대 시대의 관광은 모든 것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비극적 사고의 장소, 학살의 기억까지도 관광의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역사경관, 도시경관, 문화경관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 형태의 관광욕구가 공존하는 현상은 관광객과 지역주민들 사이의 마주침과 어우러짐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 높은 담벼락과 안전시설로 격리된 고급휴양지도 생겨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시장, 오래된 골목, 역사적 유적지, 건축물을 감상하면서 걷고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것을 원하게 된다.  대중관광 시대가 나은 여행의 ‘민주화’와 낭만적 시선이 원한 정서적 체험을 모두 보존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즉흥적이고 가벼운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경관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의 마주침이 장소가 가지는 경관적 아름다움, 역사적 의미, 문화적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과 공존하고 소통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제주의 관광산업은 그 어떤 것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낭만적 관광을 원하는 사람들은 콘크리트와 자동차로 상징되는 자연경관 파괴에 실망한다. 포스트모던 관광이 열망하는 제주가 제공하는 특색 없는 ‘관광 상품’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다. 제주의 문화와 역사경관은 마모되고 침식되어 더 이상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관광자원을 되살리고 갱신하는 역할을 하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양식조차 파괴된다. 상품화되고 획일화된 관광의 시선은 제주사람들의 시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전근대 시대 여행은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은 시간과 이동 경로를 특징으로 했고 여행객보다는 여행객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위에 있었다. 낯선 사람은 환대받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삶의 리듬과 템포는 방해받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의 산업화된 관광의 시선에는 지역주민들은 빠져 있다. 그들의 삶은 박제화 된 구경거리로 전락하거나 안전을 이유로 관광객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위험으로 간주된다. 이제 제주사람도 이러한 조건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들이 살아 내었던 삶의 양식은 오로지 화폐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논리에 의해 대체되고 그러한 논리는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생태적 조건조차 급속도로 파괴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상실, 자연의 파괴, 삶의 공동체의 붕괴가 제주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실존적 위기인 것이다. 

양에만 치중했던 ‘관광 정책’이 제주에 가져다준 것

문화적 흐름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개발의 논리가 집중되고 있는 제주에는 낭만적 관광의 시선과  대중적 관광의 시선과 탈근대적 관광의 시선이 공존한다. 서로 조화로운 상태로 공존하는 것도, 그렇다고 대립하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관광객이 제주도에 오는 것은 한라산과 바다, 그리고 오름이라는 자연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낭만적 관광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낭만적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그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 성판악 등산로 입구 주변 대로에 불법 주차된 렌터카가 상징하는 것은 집합적 시선이 아닌 개별화된 관광의 시선이 우세한 징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기차와 버스가 아닌 개별화된 이동수단을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비하게 늘어선 자동차는 전혀 낭만적이지 못하다. 자연을 ‘맨발로 걸으면서’ 촉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자연과의 교감은 늘어선 자동차만큼이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무리 속에서는 체험될 수 없다. 

오래된 도심과 새롭게 조성된 도심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집합적 노동으로 만들어져 온 ‘작품’으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고 렌터카로 보호받는 관광객이 가로질러 관통하는 공간으로 전락한다. 제주시의 상징인 관덕정 주변마저도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가 주차되는 공간일 뿐이다. 그들은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목적지는 면세점과 넓은 자리를 제공하는 식당일뿐이다. 대중관광의 시대의 함께 동일한 목적지를 공유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가족과 친구관계를 함께 나누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면세점에서 쇼핑센터로 날라지는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행위에 의해 지배된다. 

제주가 가지는 낭만적 이미지는 산업화된 관광이 제공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이동과 숙박 시설에 의해 퇴색되면서 소비의 팽창이라는 탈근대성의 부정적 측면에 의해 위태롭게 유지된다. 여기서 여전히 제주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유치, 집값과 땅값 상승, 개발 사업에 다른 도전체의 경제성장을 다룰 때 전제되는 평균으로서의 제주사람은 존재하지만 제주라는 장소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광의 자원이라고 이야기되는 제주의 모습은 제주사람들이 살아 왔던 흔적이고 현재를 사는 모습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였다. 제주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관광산업과 급속한 개발은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본말이 전도되어 버렸다. 제주사람들의 삶은 관광과 개발에 종속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관광과 개발이 높은 삶의 질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관광객 증가와 자본유치, 대규모 개발사업, 집값과 지가의 상승은 소수의 관료, 정치엘리트, 개발업자, 토지소유자들에게는 즐거운 소식이겠지만 대부분의 제주사람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 졌다. 더군다나 이 과정은 제주인의 삶의 방식, 제주인의 전통, 제주인의 문화, 제주인이 자연과 어우러져 살던 모습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식의 개발은 제주의 관광자원 자체를 마모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관광산업과 대규모 개발이 제주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일자리는 고작해야 불안정한 허드렛일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과연 ‘제주다움’은 무엇인가?

제주는 과거로부터 연대와 협동의 삶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연대와 협동의 원리는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형되어야 한다. 근대적 합리성의 가져다 준 민주주의가 결여된 연대와 협동은 자칫 비합리적이고 사적인 연줄망으로 전락할 수 있다. 맹목적으로 양적 팽창을 지향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어두운 면이 전근대적인 연고주의와 결합되면 사적으로 형성된 이익집단이 공적인 제도와 절차를 압도할 수 있다. 여기에 부채에 기댄 소비주의가 더해지면 삶의 조건은 더욱 팍팍해진다. 연대와 협동은 화폐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제주다움의 기본이 되는 협동과 연대의 원리는 자연과 공존하며, 자연에 감사하고, 이웃과 나누는 삶의 모습에서 구현되었다. 이제 그러한 토대를 보존하면서도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차이와 개성을 존중하고, 차이와 개성으로부터 나오는 서로 다른 요구와 필요를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제주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제주다움’제주의 관광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주는 교통이 불편한 시절 가지고 있었던 ‘이국적’인 매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중관광을 끌어 들일 수 있는 도시경관, 역사적 흔적, 문화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주의 생태계는 자연과의 개별적인 교감을 추구하는 낭만적 관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 환경을 가지고 있다. 제주는 이 각각의 시선이 균형 있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관광의 욕구가 공존하는 것은 전근대와 근대가 섞여서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고 서로 다른 실천들이 상호작용하는, 그럼으로써 끝없이 새로운 변이들을 만들어 내는 탈근대성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적 발전에 의한 시·공간의 압축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무력화된 바다의 ‘닫힘’ 효과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들어오는 흐름, 압도적인 ‘열림’의 효과에 맞설 수 있는 ‘제주다움’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낡은 옛것에 낭만적 호소가 아니다. 이미 ‘제주다움’은 새로운 변종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맞섬의 근거는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토대를 둔 연대와 협동이지만, 이것에 멈추지 않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고 폭력의 희생자였던 제주로부터 인권과 평화를 기본가치로 세우고 다층적인(multi-scalar) 지리적 효과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제주의 지리적 위치로부터 인권, 평화, 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아시아적 가치를 표방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체계 속의 동아시아가 대립과 갈등, 군사적 충돌의 장이었고 여전히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문화적 교차지로서의 제주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관광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에 이르고 있지는 못하다. 여전히 제주 사람들의 시선에서 관광산업과 제주 전체의 발전을 바라보지 못하고 경제적 가치로 환산된 목표에 집착하고 있다. 이미 파괴적인 개발주의에 따라 관광 인프라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킬 계획은 생각하지 못하면서 ‘구호’만 외치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경관과 도시경관, 문화경관과 역사경관 모두 그곳을 방문하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양한 장소들에게 생기가 불어넣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말 건넴과 마주침을 통해 공간이 새롭게 재생산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정도의 전환을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관광객을 오직 입도 숫자로만 계산하고 그들이 쓰고 가는 돈의 액수로만 생각하고 있다. 관광산업을 발전시킨다는 이유를 대며 곶자왈에 사파리를 만들고, 생태적 수용력을 해치는 유원지를 추진하고 있다. 관리하기 어려운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공항을 마치 그것 없이는 제주가 발전할 수 없을 것처럼 추진하고 있다. 사드배치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제주의 관광을 성찰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생각의 전환은 충분하지 않다.  

제주에 적합한 관광패러다임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전환은 ‘변화되어야 하는’ 낡은 경제패러다임 안에서의 전환이다. 전환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어쨌든  새로운 관광 패러다임에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제주의 미래 관광은 앞에서 제시된 ‘지속 가능한 발전계획’의 전제아래 기획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태적 수용능력과 사회적 수용능력 모두를 고려한 관광산업이어야 한다. 관광을 위한 개발이 제주의 자연을 훼손하고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하수와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관광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제주도와 제주인을 객체화하는 관광산업은 제주의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둘째, 대중관광, 낭만적 관광, 탈근대 관광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제주 관광’의 모델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대중관광이 가지는 획일성과 단순성은 탈근대 관광의 다양성에 의해 변화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집합적 성격은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낭만적 관광의 시선이 원하는 자연과의 교감과 정서적 감동은 엘리트계급의 구별 짓기를 탈피해서 생태적 교육으로 대중화되어야 한다. 개인으로서 자연과 교감하지만 그것이 대중관광을 낮게 평가하는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 관광’ 모델은 ‘지속 가능한 개발 계획’의 토대 위에 접근성이 고려된 편의시설, 마주침과 혼자 있음을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도시계획과 관광 개발계획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 따라서 ‘제주 관광’ 모델은 자연 경관 관광지를 도로와 자동차로부터 격리시키고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지금처럼 자연경관 바로 앞까지 대로를 뚫고 콘크리트를 발라 대형 주차장을 만드는 것은 ‘제주 관광’ 모델에 역행하는 것이다. 한라산, 오름, 올레길의 주변은 도로와 자동차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걷는 여행을 관광의 중심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의 원하는 자연속의 ‘의도된 고독’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도심의 문화적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와 멀티플랙스에 의해 왜곡된 ‘작품으로서의 도시’가 가지는 상징성의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성과 상징성은 사람들이 모이고 조우하고 대화할 때에만 가능하다. 도시는 원래 그렇게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곳이다. 자동차와 도로는 자연을 훼손하는 만큼 도시의 중심성과 상징성을 해친다. 그래서 버려진 원도심의 재생은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 안에서 여행자와 제주사람들은 서로 마주치고, 말 건네고, 어우러져 융합되어 장소성을 지속적으로 갱신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역사적 건축과 새로 지어진 건물, 그 사이 사이에 남아있는 역사적 이야기들이 걷고 대화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환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의미의 창조인 것이다. 당장으로 둘러싸여, CCTV로 감시되는 카지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는 이렇게 만들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다섯째, 이미 도심의 중심성과 상징성의 회복에서 암시된 것처럼 ‘제주 관광’ 모델은 규격화된 관광 상품을 탈피해야 한다. 산업의 시선에서 찍어내진 상품은 소비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기능적인 고려에 의해서 상품의 목적과 사용방법까지 정해져 있는 것이다.‘제주 관광’ 모델은 이런 획일화를 탈피해야 한다. 자연, 건축, 역사적 내러티브, 문화적 자원은 느슨하게만 포장되어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실천과 개입, 그리고 해석에 의해 재해석 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해석과 갱신은 섬으로서 제주가 가진 열림과 닫힘이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여섯째, 자연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설들로부터 보호받고 도시가 상징성과 중심성을 회복하게 되면 제주사람들은 더 이상 관광의 시선이 바라보는 객체에 머물지 않는다. 흐름과 이동의 경로에 위치한 하나의 주체로 앞에서 언급한 재해석과 갱신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힘에 맞설 수 있는 ‘제주다움’을 창조하면서 그것을 통해 흐름과 이동의 교차지로서의 제주를 가꾸어가는 공동의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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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일곱째, 지금까지 이야기한 ‘제주 관광’모델은 자연의 산물인 제주의 자연환경과 오랜 시간동의 집합적 노동의 산물인 도시경관을 사유화하는 것을 저지하게 될 것이다. 사유화할 수 없는 공동의 자원을 절단해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허용하는 것 자체가 ‘제주다움’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관의 사유화는 맹목적이고 돌진적인 개발과 물질적 이익추구가 제어장치 없이 폭주하도록 하는 주범이다. /서영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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