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오미래 / 재일동포 3세, 오광현 제주4.3일본유족회장 자녀

'제주4.3위령여행' 참가는 올해가 두 번째다. 처음 참가한 지난해는 나의 첫 제주 방문이기도 했다. 4월이기도 하고, 벚꽃이나 유채꽃, 그 외 울긋불긋 꽃들이 많이 피었다. 자연 경관도 풍부하고 바다가 아름답고, 무언가 서울보다 느긋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식사도 무엇을 먹어도 맛있고, 또한 제주 거리는 나의 근거지(거주지)인 일본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区)’를 떠올리게 하는, 그립고 안심하는 분위기처럼 느껴져 아무튼 마음 편했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은 이렇게 좋은 곳일까. 내 뿌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뭔가 기쁘다’라고 생각한 순간을 지금도 잘 기억한다. 그리고 4.3사건에 얽힌 땅을 현장학습으로 계속 돌아다니면서, 예를 들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조용한 마을에서,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 죄 없는 주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된 사실이 눈 앞에 있는 평온한 풍경과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잘 기억한다.

기다리던 실감은 4월 3일 제주4.3기념공원(제주4.3평화공원)에서 위령제 당일 할아버지 동생, 사촌의 묘비와 대면했을 때였다. 거기에는 두 사람 이외의 수많은 묘비도 있었다. 그 모두는 4.3사건으로 희생되고 아직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분으로, 그마저 극히 일부라고 들었다. 예비검속으로 끌려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된 할아버지 동생과 사촌은 21살·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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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아버지와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오미래 씨(오른쪽). 묘비에 새겨진 '오동식'은 오미래씨의 작은 할아버지다. 제공=김창후. ⓒ제주의소리

그곳에는 두 사람 이외의 묘비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으며, 그 모두가 4.3사건으로 희생되고 지금도 시신을 못 찾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일부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동생의 묘비에 새겨진 나와 같은 성 ‘오’, 할아버지 이름의 일부와 같이 ‘식’이라는 한글. 그 파인 홈을 따라 덧그리며 겨우 4.3사건에 대한 실감, 내 친족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살해됐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났다.

올해도 현지학습에서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고, 작년에 가지 않았던 장소도 방문했지만 내가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역시 올해도 4.3기념공원의 할아버지 동생과 사촌의 묘비를 방문했을 때였다. 근처 누군가의 묘비 앞에서 꽤 나이 들어 보이는 할머니와 그 딸 같은 연배인 여성이 간단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준비하고 계셨지만 조금씩 두 분 감정이 넘치고 있는 것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면서 묘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에, 69년이 지나도 이 사건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았다고 통감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사진으로 밖에 모르는 할아버지는 끝까지 결코 4.3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한다. 애도의 말도 허용되지 않았다. 4.3사건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랑하는 이쿠노쿠와 제주가 어딘지 닮은 것, 이쿠노쿠에 제주 사람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고 한다.

4.3사건에 대해 생각하는 게 힘들고, 가능하면 생각없이 살고 싶다는 게 한심하지만, 솔직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마 자신이 4.3사건희생자의 유족이라는 실감, 그리고 근거지인 이쿠노쿠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도록 제주와 관계, 심지어 4.3사건과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들의 세대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어 나가야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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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제주를 찾은 오미래 씨 일행이 일본군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공=김창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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