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8) 여성이 글공부해서 도원수 벼슬 받아 온 데 없다
  
여성 비하는 제주만의 일이 아니다. 남존여비는 조선 500년을 관류(貫流)했던 편향적 사고다. 한마디로 가부장적인 시대의 산물이다. 여성에게는 김씨, 고씨, 이씨라고 성만 있었지 이름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이 극명해진다. 

허 균의 누이 이름이 초희(楚姬)이고, 난설헌(蘭雪軒)이라 했으나 난설헌은 기거하던 집에 붙였던 당호(堂號)에서 나온 호(號)였다. 5만 원 권 지폐에 곱게 땋은 머리 짓고 있는 조선의 여인 사임당도 당호일 뿐 성함이 아니다. ‘사임당 신씨’라 하고 있지만 실은 살던 집과 성씨를 묶어 놓은 이름이다.

남녀 차별이 우심한 가운데 여자가 겪어야 했던 고난 고초도 극에 달했었다. 그중에도 칠거지악은 형벌이었다. 특히 혼인해 아들이 없어 후사를 그르치면 집에서 쫓겨났으니 격세지감을 맛보게 된다. 

그 위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게 있었다.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에 이르기를, “여자는 세 가지 좇아야 할 길이 있는데(女子有三從之道),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在家從父), 시집가면 지아비에게 순종하며(適人從夫),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좇아야 한다(夫死從子).”라 했다.

삼종지도 곧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법도(法道)라 이른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여자가 마땅히 복종해야 할 예도라 힘이었다.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아 그 권리를 억압했던 것으로,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오히려 판세가 역전돼 여성상위시대라 하고 그에 더해 여성을 존중하는 페미니즘 시대가 아닌가.

옛날에야 어디 그랬던가. 여자에게 공부시켜 봤자 무슨 도원수 벼슬을 할 것도 아니라 한 것. 한데 정도를 훨씬 더 넘었다.

제주속담에 “암탉이 울엉 날 샌 디 읏다”고 했다. 암탉이 울어 날 샐 일 없다 함이니, 여자가 나대어 어떤 일이 성취된 적이 없다는 뜻을 빗댐 아닌가. 우회적으로 빗대고 에둘렀다 하나 정도를 지나친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집안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활발해서 더 크게 떠들며 이 일 저 일 간섭하면 “암탉이 운다(牝鷄司辰 : 암탉이 울어 새벽을 알림, 암컷 빈(牝), 새벽을 알리는 일(司辰)을 맡는다는 뜻으로 ‘닭’을 달리 이름)”고 일갈했다. 심지어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까지 갔다. 집안에서 부인 되는 이가 남편보가 기승(氣勝)해서 떠들고 꼬치꼬치 간섭하면 집안 일이 꼬여 잘되지 않는다고 대놓고 직설한다.

월탄 박종하의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에도 나온다.

「그러게 이 망할 것아, 내가 늘 뭐라고 그랬어. 나이도 인제 열다섯이나 되니 얼른 임자를 골라서 맡기쟀드니, 그저 데릴사위만 하겠다고 안달을 하구 고르고 고르더니 요 모양이야. 그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앞의 것과 뉘앙스는 다른 듯도 하지만, 여자를 등장시켜 거기서 거기인 게 맞다. 

“예폔 싯만 모이민 접시 고냥 뚫른다”(여편네 셋만 모이면 접시 구멍을 뚫는다.)고도 했다. 여편네들이 모이면 시끄럽고 또 무슨 좋지 않은 일을 낸다 함이다. 어느 시대를 건너오며 한 말이었을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워낙 혐오 쪽으로 흘러오면서도 제주에는 여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녹여내고 있는 말이 있다. 

“아맹 봐도 곱들락헌 이녁”(아무리 바라보아도 곱고 고운 당신)이 그것이다. 삼다도의 여다(女多)가 남녀의 인구수를 두고 말한 것이라기보다 여자들이 눈에 띄게 활동을 많이 한다는 의미이고 보면, 제주 남자들 여자 사랑이 각별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런다 해도 자고이래, 제주 남자들이 여자(부인)을 아낀다고 해 오진 않았다. 육지 남자들 여자 대접이 각별하다고 깨놓고 말하기 일쑤다. 뒤집어 말하면, 제주 여성들 활동이 겉으로 두드러지니 그게 남성들의 홀대로 비쳐진 것은 아닐는지 모르긴 하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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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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