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 무꽃 / 문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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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꽃. ⓒ 김연미

송구하고
송구한 건
하늘도 마찬가지

거저 줘도 안 뽑아가는
천여 평 월동 무밭

여태껏
못 갈아엎고
누리느니,
이 호사!

-문순자 <무꽃> 전문-

갑자기 눈이 환해졌다. 미세먼지와 황사 가득한 날씨. 뻣뻣하게 긴장을 놓지 않던 눈가의 주름들이 무장해제 당하듯 풀어졌다.  밭 하나를 가득 채운 하얀 꽃. 무꽃이다. 유채꽃 다 지고, 봄의 화려함을 지우며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는데, 뒤늦게, 혹은 뜬금없이 들판 한쪽에 피어난 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걸린 미련처럼 꽃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초록 이파리는 부드럽고 꽃은 스무 살 처녀의 볼처럼 발그스레한 하얀색이다. 가던 길을 잊고 오래도록 꽃밭에 머물렀다. 아름다움 앞에서 정신을 놓는 건 죄악이 아니다.

생각지 못한 이 호사를 만끽하다 문득 무꽃이 피는 이유를 생각한다. 월동 무는 겨울을 넘기면 곧바로 수확이 되어야 한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단단한 상품으로 김치시장에 팔리고, 채소시장에서 그 이름값을 해야 한다. 봄이 오기 전에 뽑혀야 하기에 무꽃이 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며 피어났을까. 이 화려함이 ‘송구하고/ 송구한/’ 이유는 뭘까.

문순자님의 <무꽃>은 그 이유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거저 줘도 안 뽑아’ 갈 정도로 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는 것. 피멍 맺히는 농부들이 오늘 내일 하며 수확의 기회를 갈구하는 사이, 속도 없이 꽃은 피어나 이렇게 아름다움을 내 뿜고 있는 것이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까.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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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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