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 시간여행] (3) 성산읍 오조리 밭담 이야기
 
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되고 3주년을 맞이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온 제주밭담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밭담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본 연재는 밭담길을 따라 걷다 만난 우리네 삼촌들에 관한 것이다. 밭담과 함께 섬의 살림을 일구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주 농민들에게, 미처 보물인줄 몰랐던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주밭담의 역사이고, 삼춘들의 살아 온 이야기 속에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성산읍 오조리의 돌챙이 하르방_오두식 석공(좌)과 홍명상 오조리 노인회장.JPG
▲ 성산읍 오조리의 돌챙이 하르방_오두식 석공(좌)과 홍명상 오조리 노인회장. ⓒ정신지
오두식 하르방은 올해 여든 여섯, 마을의 오래된 석공이다. 1932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일제강점기 속에서 보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배우고, 고향말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어릴 적부터 하르방은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했다.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고구마, 사시사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해도 먹을 것 하나 없던 지난날이었다. 일본군에게 식량을 뺏기고, 숨겨놓은 식량을 마음 졸여가며 나누어 먹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이리저리 구르다 끝나버린 청춘

사무치도록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하르방은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떠났다.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누나가 살던 부산에서 돈을 벌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에 가는 대신 신문배달을 하며 끼니를 때웠다. 그 사이 제주에서는 끔찍한 4.3사건이 터졌다. 시대의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청년들이 모조리 군에 소집되어갔으나, 나이가 한 살 모자랐던 그는 징집에서 제외 당했다. 군으로 끌려가진 않았으나, 피난민을 제주로 보내기 위한 배에 태워져 본의 아니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화물선에 짐처럼 구겨진 채 부산에서 제주도까지 오는데 꼬박 삼 일이 걸렸다. 

몇 해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육지와는 달리 17세부터 군인을  소집한다는 제주에서, 그는 운명의 장난처럼 군인이 되어 또다시 부산으로 보내진다. 제주에 4.3사건이 일어나 온 섬이 두려움에 휩싸였던 당시의 일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통신병이 되어야했던 그는 부산에서 그렇게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발발한 한국 전쟁의 파도에 밀려 부대는 서울로 옮겨간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차에 실려 덜컹덜컹 실려 가는 동안 밖에서는 하늘이 꺼질 듯 폭탄 소리가 났다. 이리저리 구르다 서울까지 왔건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대로 죽겠구나, 생각이 들 무렵 서울에 도착했다. 

새 부대에서는 사진중대에 배치 받았다. 총칼을 들고 싸우는 일 대신, 그는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운이 좋았다고 하르방은 말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이곳저곳이 망가지고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모습을 온종일 사진으로 만들며 마음 편할 날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용기가 되었던 것이 당시 한 상병이 해준 말이다.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 것 같은 그 말을 하르방은 선명히 기억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고, 그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렇게 새파란 십대의 끝과 이십대의 시작을 군인으로 보낸 하르방은, 전쟁이 끝나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 년이라는 소중한 청춘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일자리는 없고 일거리는 태산 

4.3사건과 전쟁을 거친 제주에는 일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일거리를 찾아야했던 그는 석공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스물 둘의 일이다. 남자가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남의 집 아들을 빌려가면서 밭을 갈았다. 남자라는 이유로 해야 할 일거리가 태산이던 시절이다. 그 중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또 기술이 필요했던 일이 돌챙이의 일이다. 
군에 있으며 잠시 휴가로 들른 고향에서 그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4.3사건을 겪으며 많은 남성들이 희생을 당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있던 제주에서는 여성들의 삶 역시 가혹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를 잇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강요당했으나 남자가 흔치 않았고, 마을에서는 갖가지 범죄가 득실댔다. 그래서 군에 간 청년이 돌아오면 서로 앞을 다투어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식을 올린 아내와 하르방은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몸이 많이 편찮은 탓에 하르방은 온종일 집에서 병든 할망을 돌본다.
그의 나이 삼십대를 전후로, 제주의 농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곡식 농사 대신 귤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석공은 ‘집담’이나 ‘산담’(무덤 가장자리에 쌓는 돌담)을 주로 쌓기에 밭담을 쌓는 법이 거의 없었으나, 과수원이 생기며 방풍을 위해 높은 담을 쌓을 필요가 생기자 석공의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장례문화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버린 석공의 일은 산담을 쌓는 일이다.JPG
▲ 장례문화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버린 석공의 일은 산담을 쌓는 일이다. ⓒ정신지

석공으로 살아온 60년 인생길

돌챙이의 일은 돌과 함께 살아 온 신체의 경험 없이는 익히기가 어렵다. 하르방은, ‘그저 돌 몇 개 주어다가 쌓아가는 석공의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가르칠 것이 없다 하신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꼭꼭 숨겨진 그들의 기술과 지혜가 없었더라면, 제주의 마을은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을 것에 틀림없다. 

돌챙이는 힘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일만도 아니다. 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각각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석공의 일이다. 그들은 주로 ‘패’를 이루어 집단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열댓 명이 한 팀이 되어 일을 하는데, 하르방은 그는 마을 돌챙의 패의 리더였다. 일을 받아오면 순서를 정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임금을 나누는 일을 맡아했던 그에게는 늘 강한 책임감이 따랐다.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석공의 일 중의 하나는 마을의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이다. 선배석공의 손길이 느껴지는 연자방아.JPG
▲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석공의 일 중의 하나는 마을의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이다. 선배석공의 손길이 느껴지는 연자방아. ⓒ정신지

제대로 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자리에 잘 옮겨 놓는 일’이다. 지렛대를 이용해 큰 돌을 움직이고, ‘물매’와 ‘갠노’라 불리우는 망치를 ‘야’라는 못을 대고 내려쳐서 크기에 맞게 깬다. 운반을 위해서는 ‘목도’라고 하는 기다란 나무봉에 밧줄로 돌을 매달아 두 명이 어깨에 이고 옮기기도 했다. 힘이 세다고 번쩍 들여 올려 돌을 옮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돌 마다 다른 특성을 이해하고 어느 돌이 어느 곳에 필요한지를 익히는 일, 그리고 여럿이 함께 일을 할 때 필요한 눈썰미가 요구된다.

돌을 쪼개고 쌓아가는 것 역시 수백 가지 방법이 있다. 자신의 방식에 확신이 들 때 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해야 익숙해지는 것이 돌챙이의 기술이다. 시간과의 싸움과도 같은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제각각의 석공들은 자신의 힘의 한계를 알아야하며 스스로 재량을 갈고 닦아 나가야 한다. 한 번 쌓은 담이 쓰러지면 실패이기 때문에, 돌 하나 하나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지난 날 석공으로 일하던 두 분이 돌담 쌓기 시범을 보여주신다.JPG
▲ 지난 날 석공으로 일하던 두 분이 돌담 쌓기 시범을 보여주신다. ⓒ정신지

선배 돌챙이들에게는 늘 말없이 배웠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야기 하는 법이 없는 것이 그들의 세계다. 묵묵히 일하며 눈치껏 선배들을 지켜보며 요령껏 일을 익혔다. 60년이 넘도록 석공으로 일해 온 그이지만, 자신보다 이전에 석공으로 일했던 선배들의 솜씨는 지금도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지금은 사라져버린 마을의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등은 보통일이 아닌데, 지금도 쓰려면 쓸 수 있는 방아의 커다란 돌을 만든 선배들의 손길에 아직도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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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 없다 여겨지던 것에 쓸모를 불어넣던 석공의 손. ⓒ정신지

쓸모를 만드는 석공의 손에 다시금 쓸모를 불어야할 때

언제부턴가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꼭 필요한 존재이던 돌챙이들은 이제 모두 할아버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돌을 쌓아 집을 짓지 않으며, 들판에 무덤을 만들어 산담을 두르지 않는다. 쓸모없다 여겨지던 것에 쓸모를 불어 넣어온 돌챙이들의 손을, 사람들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직업은, 생활의 변화와 함께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일자리 중 하나다. 이따금씩 새로 지은 집에 돌담을 쌓아달라는 요청을 받곤 하지만, 전과 같은 석공의 일은 아니라고 한다. 

변화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나, 그는 제주의 밭담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본다. 비록 돌챙이의 일거리는 하나 둘 사라져가지만, 농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밭담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땅이 있고, 그 땅 위에는 돌이 있기에, 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밭담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땅과 함께 살며 땅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밭담을 쌓아왔다. 쓰러지면 다시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밭담을 지키는 일은 그야말로 ‘배우지 않아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라 말씀하신다. 어떻게 해 나가면 좋겠느냐 물으니, 그는 ‘너무 어렵게 생각지말고, 어려우면 서로 도왔던 옛 시절을 떠올리라’ 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의 가치를 돈에 둘 것이 아니라, 비록 나의 일이 당장 돈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지언정 결국엔 내가 남을 도운 만큼 남도 나를 돕는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손쉽게 밭담을 지킬 수 있는 지혜가 될 것이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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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 쌓기 시범을 보여주시는 하르방. ⓒ정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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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 쌓기 시범을 보여주시는 하르방. ⓒ정신지

하루하루를 돌담 쌓듯 

“하루하루를 돌담 쌓아 올리듯 정성껏 살아라.” 살아가며 무엇이 소중한지를 여쭈었더니 돌아온 하르방의 답이다. 이제 더 이상 하는 일 없이, 평생 일만 하다 병들어버린 아내를 돌보는 것이 그의 일과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마을을 산책하는 일 이외에 딱히 할 일은 없는 그이지만, 지금도 길을 가다 쓰러진 담이 있으면 내 밭이 아니고 내 집이 아니더라도 당연한 듯 다시 쌓아 놓는다. 시골에 사는 제주의 삼춘들에게 그것은 습관과도 같다. ‘내 밭에서 내가 농사를 지어야하는데 돌이 떨어져 있으니 내가 치운다는 단순한 마음’, ‘나도 그럴 때가 있듯 남도 그럴 수 있다는 배려의 마음’, ‘함께 쓰는 담이니 같이 하면 된다는 상생의 마음’이 겹겹이 더불어 쌓인 것이 제주의 밭담이다. 경계를 가르기 위해 ‘선을 긋는다’기보다, 면과 면을 ‘이어 붙이는’ 역할을 했던 밭담은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 우리네 농촌사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길을 걷다 발에 채는 것이 돌이라 할 만큼 많은 돌 위에서 우리는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쓸모없다 여겨지는 것,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추구하는 산업의 목표이자 새로운 문화의 모양새이기도 하다. 

‘별 거 없다’, ‘중요한 일 아니다’, 말하며 기술을 갈고 닦은 석공들의 겸손한 자세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 온 전통사회의 모습은 이미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한 분 한 분의 삼춘들이 살아온 제각각의 길 위에, 소중한 이야기를 머금은 돌이 하나 둘 쌓여 오늘에 이른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고민인 우리에게는 이미 그들이 물려준 소중한 이정표가 있다. /정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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