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 시간여행] (4)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밭담 이야기 

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되고 3주년을 맞이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온 제주밭담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밭담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본 연재는 밭담길을 따라 걷다 만난 우리네 삼촌들에 관한 것이다. 밭담과 함께 섬의 살림을 일구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주 농민들에게, 미처 보물인줄 몰랐던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주밭담의 역사이고, 삼춘들의 살아 온 이야기 속에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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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으로 땅을 살아오지 못한 세대에게 전달하기 힘든 이야기가 많다. ⓒ정신지
‘밭담’ 이외에도 제주에는 집을 만드는 ‘집담’, 집에서 큰 길로 나가는 길목을 의미하는 올레(관광코스의 ‘올레’가 아님)에 쌓은 ‘올렛담’, 흑돼지를 이용한 생태화장실인 통시를 만드는 ‘통싯담’, 죽은 사람을 토장한 후 무덤을 만들고 그 주위에 두른 ‘산담’, 조수의 차를 이용한 공동어장으로 쓰이는 바다 한 복판의 ‘원담’ 등, 많은 종류의 돌담이 있다.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장소가 돌담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손길에 의해 돌은 담이 되고, 삶의 터전이 되었다. 제주의 밭담에는 지천에 널린 자연의 선물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경관을 해치지 않는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알다시피 돌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끼가 끼고 넝쿨이 자라는 제주의 돌담은 시골 마을 한 자리에 커다랗게 서 있는 고목나무를 닮았다.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그 긴 시간을 위로 옆으로 확장시키며 여기까지 왔다. 누가 놓았는지 모를 ‘굽자리’(밭담의 가장 밑 부분에 놓는 돌) 위에, 제각각의 시간과 손길을 간직한 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사람은 떠나도 돌은 억겁의 시간 섬을 지킨다. 그 돌이 선이 되어 이어 붙인 삶의 숫자는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제주의 서부에 위치한 애월읍 어음리의 한 노인정에서 평생 밭을 일구며 살아오신 어르신들을 만났다. ‘잣돌‘이라 불리는 잔잔한 돌로 쌓인 ’잣담‘이 겹겹이 쌓인 풍경이 독특한 어음리에서 그 돌을 쌓아올린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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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 한 가운데 머들이라 불리는 돌무덤이 보인다. ⓒ정신지

산담-장례문화와 석공 

올해 82세인 양한동 할아버지는 어음리에서 나고 자란 석공이다. 지금까지 쌓은 산담이 백 개는 족히 넘을 것이라 하신다. 담을 쌓는 것은 몸으로 배운 것이다. 석공이라는 것은 스승이 있어 그 기술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요령을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신다. 지금은 장례문화가 예전과 달라 산담을 쌓는 일이 거의 없지만, 지난 날 석공의 가장 주된 일은 산담을 쌓는 일이었다. 산담을 보면 그 집이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알 수 있다 할 만큼 사람들은 석공에게 많은 돈을 주고 담을 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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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보다 돌이 많은 땅. ⓒ정신지

‘산담을 잘 쌓아 놓는 일’을 제주의 장례문화에서는 ‘치례했다’는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잘 쌓여진 산담을 보며 “치례했져(무덤을 잘 차려놓았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만큼 죽은 자를 위한 정성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돈을 많이 낸 만큼 공을 들여 멋들어진 산담을 쌓는 것이 조상을 위한 예의다. 석공을 부를 돈이 없는 사람은 산담을 쌓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밭담과는 달리 산담은 석공의 기술력과 전통적인 절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쓰는 거의 모든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돌이 필요했고, 돌에 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석공은 마을 사람들에게 늘 존대받는 직업이었다. 집을 만들 적에도 돌을 쌓는 일부터 시공이 시작된다. 화장실에 쌓는 통싯담도 마찬가지다. 생활에 필요한 기본 틀에는 꼭 돌이 필요했고 곳곳 마다 쌓는 방식이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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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밭담 풍경. ⓒ정신지

성담-혹독한 시절의 기억

4.3사건 당시에는 어음리 사람들도 힘을 모아 성담을 쌓았다. 지금은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는 어린시절의 기억이다. 마을 주민은 밭담에 있던 돌을 모조리 마차에 실어 담아 성담을 쌓았고 그 밑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때문에 마을의 밭에 담이 없어 풍경이 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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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 파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돌이지만 이 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정신지

"이 마을에도, 다른 마을도 전부 경했주만(그랬지만)은. 보초 서고 죽창 들고 난리도 아니어서(아니었어). 하나만 고라주켜(이야기해 줄게). 4.3때, 난 봉성마을로 소까이 강 살았주게(피난 가서 살고 있었어). 어느날 사람들이 나 신디(내게) 고라라(말하더라고). 그디(거기) 지금도 ‘빌레못’이라는 동굴이 이신디(있는데), 그디 곱암시민(숨어있으면) 살아진댄(살 수 있다고), 그리로 데리러 오캔 행(온다고 해서)... 경행(그래서) 우리 고모신디(에게) 강(가서) 말 하니까, 할망일랑(할머니는) 자기가 맡아놓캔 행(놓겠다고 하시고는), 니들만 글랜(가라고) 헌 거라. 

겐디(그런데) 마침 형님이 밤이 되니까 막 설사를 하고 난리라. 겡(그래서) 형님이 아파부난(아파서) 우린 빌레못에 가질 못해서(못했어). 뒤날(뒷날) 되니까 사람들 왕(와서) 곧기를(말하기를), 어제 굴에 간 사람들 다 내쳐가지고 막 총살시켰잰(총살시켰다고), 몬~딱(모두)... 게난(그러니) 난 형이 아파부난 못 간 건디(것인데), 그때 그디 가시민 나도 가족도 몬딱 죽을뻔한 거. 당시에 동굴에서 혼(한) 스무 명 죽어신가(죽었나)? 허이고...나 그 얘기하잰 하민(하면) 한도 끝도 어서. 

...옛날엔 ‘서 갈아먹을 거 어시민(없으면) 장가도 못간댄 해나서(했었어). 여자 집에 돈 좀 있고 허민(하면은) 딸을 내 주지도 않았주게(않았어). ‘서 갈아먹을거 이시냐?’ 라는 말이 그 말이라. 보릿고개 때 보리가 익기도 전에 그냥 그걸 토다다가(뜯어다가) 솥에 솖안(삶았어). 그걸 부병이네(부벼서) 먹었주게(먹었어). 방애에(방아간에) 강(가서) 찧질 않고 그냥 먹는 보리. 그걸 갈아먹는 것이 ‘서 갈아먹는 거’주게(였지). 겡(그래서), 갈아 먹을 서도 없잰 허민(없다고 하면) 시집 안 오고 해났거든(했었거든). 게난 어신(없는) 사람은 장개(장가)도 못 가나서... 허이고오, 이백 가지라도 고르랜 하민(말하라면) 곧주만은(말해주겠다만), 끝이 어서(없어), 우리 고생해 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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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밭담 풍경. ⓒ정신지

농사

한국전쟁 당시에는 마을 청년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일꾼이 모자랐다. 전쟁이 끝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며 본격적으로 보리, 콩 등을 다시 심었다고 한다. 어음리의 대표작물로 알려진 양배추는 심은지 20년 정도 밖에 안 된 새 작물이다. 브로콜리 역시 최근 심기 시작한 작물인데 현재 양배추와 함께 마을에 가장 큰 소득을 가져다 주고있다. 화학비료를 쓰기 전에는 소와 돼지의 분뇨에 보리씨를 넣고 밟은 것을 거름으로 썼다. 말과 소를 기르는 마을의 공동목장도 있었다. 말의 분뇨는 훌륭한 뗄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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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월읍 어음리에서 양한동(82) 어르신이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신지

수분이 많을 때 ‘질왓’을 갈기위해서는 날씨를 잘 선택해야했다. ‘물 모른 때(물이 말랐을 때)’ 날이 닷새 정도 좋아야 밭을 갈 수가 있지, 수분이 많으면 질퍽해서 밭을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질왓에서는 보리나 산디(밭쌀)가 잘 자라지만, 비가 많이 오거나 물이 너무 마르면 갈기 가 힘들다. 기후의 영향에 따라 밭의 재질은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농사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들이 사라져가는 옛 지명들을 하나 둘 기억해냈다. 밭을 이루는 토양의 재질도 다양하지만, 지형 또한 다양했다. ‘구름질’, ‘솔데왓’, ‘웃머리’, ‘상질왓’ 등, 마을 주변에 수많은 밭과 길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밭의 ‘도랑’과 지형을 설명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도 지형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놓았나, 선조들의 센스가 감탄스러울 정도라 하신다. ‘돌팡’이라는 쉼터 역시 마을 사람들이 짐을 지고 가다가 거기서 쉬는 곳의 이름인데, 이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사라져가는 지명만큼이나 할아버지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수눌음’이라는 제주의 협업방식이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 일했던 시절의 인심이 무엇보다 그립다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 밭에 왕(와서) 고치(함께) 검질(잡초) 매고, 다음에는 너네 꺼 하고’ 그추룩 허민(그렇게 하면) 오죽 좋으냐게, 요즘 사람들도 그 정신을 배우면 좋겠지만, 이제는 너 밭도 나 밭도 몬딱(모두) 용역을 써서 일을 햄시난 사람들이 돈 따라 움직이주게. 겐디 그것도 손이 모자랄 정도라! 게난 돈을 준댄 해도 농사일을 헐 사람이 어신(없는) 세상이 올 줄 우리가 상상이나 해시크냐 게(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몸으로 익힌 오래된 지혜

오래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묵묵히 텃밭 채소를 다듬는 백세 넘은 할망JPG.jpg
▲ 오래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묵묵히 텃밭 채소를 다듬는 백세 넘은 할망. ⓒ정신지
기계화가 농사를 편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나, 지긋하게 연세를 잡순 지금 할아버지들은 그 편안함이 주는 폐해를 몸소 느끼고 있나보다. 한창 돈 벌기 바빠 농사를 지을 적엔 느끼지 못했지만, ‘오래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 깨닫는 경우가 많다고. 일례로, 큰 비가 오면 위에서 아래로 물이 내려오는데, 밭담을 치워 버리고 경계를 허물어 버린 밭에는 물이 차오른다. 한 쪽으로 물이 차오르면 다른 밭도 자연스레 피해를 입는다. 그러니 밭담은 경계만을 말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인 셈이다. 이러한 것들을 젊은 사람들이나 육지에서 온 이주민에게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돌을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밭담은 그저 자신과 남의 땅을 경계짓는 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진 밭담이 한 줄 허물어지는 것으로 인해 내 밭 뿐 아니라 모두의 밭도 망가지는 걸 보며 어르신들은 오래된 선조들의 지혜에 고개를 숙인다. 물려받은 것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들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 세대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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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한 잣돌이 많은 밭을 작지왓이라 한다. ⓒ정신지

흙 역시 예전과 질감이 많이 달라졌다. 옛날엔 약을 한 번만 뿌려도 되었던 것이 이제는 세 번을 뿌려도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농약의 사용으로 마을의 토양은 점차 변해버렸다. 그것도, 먹고살기 바쁠 적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소에게 물을 먹이고 허벅으로 지어다 물 먹던 곳에서도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고여있는 물은 썩어 이젠 개구리 조차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것이 많고, 변해버린 것들도 많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르방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게난(그러니까) 물에 골개비(개구리)가 어서져부런(없어져 버렸어). 몬딱(다) 어디로 가신고이...”

<인터뷰 참석 = 어음리 양한동(82세, 석공), 문동수 (79세), 김재홍(76세), 강관선(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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