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0) 도둑놈이 달아날까 보다 했더니 우뚝 서더라

놀랍고 놀랍다.

도둑놈이 뛰지 않고 우뚝 서서 도리어 꾸짖는다는 말 아닌가. 
 
세상에 이럴 수가. 도둑질한 놈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질하지 않고 되레 뻔뻔하게 사람 앞에 나서다니. 거꾸로 돌아간다. 

하긴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인들 왜 없으랴. 데면데면해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고 후안무치(厚顔無恥)라 한다. 두꺼운 낯가죽을 써 뻔뻔스러운 사람을 일컬어 철면피한(鐵面皮漢)이라 말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 말들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을 알 만하다.
  
‘도둑놈이 매를 든다’ 곧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도둑이 되레 매를 든다는 것이니, 잘못된 사람이 거꾸로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른다. 다른 말로 ‘똥 뀐 놈이 성낸다’ 했으니, 이런 고약할 데가.
  
“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큰소리냐?”처럼 구어(口語)로 많이 쓴다.

경우가 좀 다르긴 하나 구체화해 한술 더 뜨면, “도둑이 도둑이야 한다”라 한다. 도둑질한 놈이 제가 아니한 체하느라고 도둑이 났다고 떠드니, 그로 말미암아 제 죄가 오히려 드러난다는 말도 될 것이다.
  
횡보 염상섭의 〈삼대〉에도 나온다.

‘도둑이 도둑이야 소리만 질렀으면 좋으련마는 그래 놓고 뒤로 돌아가서 딴 도둑질을 하니까 걱정이지.’

일상에서도 적잖게 겪는 일이다. 제가 저지른 일이 주변이나 단체 혹은 조직에 끼친 악영향을 충분히 알 만한 사람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을 예사로이 봐 온다.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술책을 쓰는 수도 있다. 이런 약은꾀를 일러 꼼수라 한다. 

그런 작자가 막무가내일 때는 참 민망하다.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다고 막되게 대놓고 나무라기도 그렇다. 작심하고 한마디 했다 외려 머쓱해지기도 한다.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참 딱한 노릇이다. ‘뻔뻔하다, 능청떤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일 테다.

▲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출처=오마이뉴스.

본디 착한 심성을 가진 제주사람들이지만, 그들 가운데도 이런 질 나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참 실감나게 표현해 놓았다. “도르가부덴 허난(도망칠까 보다 했는데)”, “우뚝 사더라(우뚝 서더라)” 했으니 도둑놈 잡으려고 뒤를 쫓던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상치 못하던 일이라 훔칫 놀랐을 게 아닌가. 그것도 오밤중 외진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요즘 세상은 그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퍽 하면 흉기를 들이대 강도짓을 하는가 하면, 그 정도가 아니다. 그에 더해 ‘묻지 마 범죄’가 선량한 시민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세상이다. 밤길 나다니기가 두렵다.

비슷한 속담들이 꽤 있다.

⧍도둑놈이 몽둥이 들고 길 위에 나선다
⧍불 난 데서 불이야 한다.
⧍도둑이 포도청 간다
⧍곱단 보난 포도청 집이라 (숨다 보니 포도청 집이더라). 피해 숨느라고 한 것이 도리어 제 발로 잡히려 걸어 들어간 꼴이 됐다는 뜻으로 뜻밖에 낭패 보는 경우를 이름이다.
⧍몽둥이 들고 포도청 담에 오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잘못해 응당 치죄(治罪)당해야 할 사람이 도리어 기세를 올리고 남을 치죄하려 든다).
⧍되 순라(巡邏) 잡다, 되잡아 흥이다(오히려 술래 잡는다. 순라: 조선 시대에, 도둑이나 화재 따위를 경계하기 위해 밤에 사람의 통행을 금하고 순찰을 돌던 군졸(卒更軍, 졸경군). 술래가 본디말)

주위를 살피며 몸조심해야 할 세상에 몸을 놓고 있다. “도둑놈이 도르카 부덴 허난 우뚝 사더라’, 알고 나니 섬뜩하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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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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