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1) 남의 소 들고 뛰는 건 구경거리
 
길들이려 했을 것이다. 억센 소가 주인을 거역해 길바닥에서 날뛰고 있다. 이만하면 스릴이 현장감으로 온다. 우직한 짐승이 일단 성을 내면 무섭다. 

순하다 해도 소 나름. 성깔 고약한 놈이 있게 마련이다. 한창 밭갈이하거나 등짐 지고 성큼성큼 걷다 홀연 발악한다고 상상해 보라. 성 난 소를 다스리기란 쉽지 않다. 고삐를 죄고 회초리로 엉덩판을 때려 봤자 도통 안 통한다. 그런다고 도를 넘게 다뤘다간 외려 더 큰 화를 부른다.

소가 입에 거품 물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감당키 어렵다. 겁먹기 전에 큰일이다. 부리기도 해야 하거니와 소, 그게 어디 작은 재산인가.
  
회상이지만, 동네 널찍한 길목에서 소에 맷돌 아래 판을 걸머지워 채찍질로 길들이는 걸 본 경험이 있다면 실감이 날 것이다. 뒷손 지고 서서 구경하는 동네 어른과 아이들. 흙길에 먼지 일으키며 내달리는 두 살 배기 소. 심심하던 참에 이런 활극(活劇)이 없다. 소를 부리기 위해 훈련시키는 의식이었다.
  
지금 눈앞에 ‘들럭퀴는 소’는 아마 황소일 테다. 힘이 어지간한 놈이다. 어쩌다 비위를 건드렸을꼬. 녀석, 단단히 성났나 보다.  

‘들럭퀴는’은 ‘길길이 날뛴다’는 뜻의 제주방언이다. 표준어 ‘날뛴다’보다 훨씬 탄력적이고 힘이 느껴지는 강한 표현이다. 그만큼 역동적이다. 천방지축, 제 힘을 다해 휘젓고 다니는 소를 주인은 다잡지 못해 혼쭐나는데, 거들지는 못할망정 옆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이런 한심할 데가. 그것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으니.
  
동네 인심이 바닥을 치고 있다. 노인네들도 그렇지, 젊은 장정들에게 이러저러 해라 겪었던 대로 소를 제압하게 묘수를 가르쳐 등을 떼밀어 줘야 옳거늘. 역지사지(易地思之), 곤경에 처했을 때 당하는 사람 입장이 돼 달려들어 돕는 게 인심이요 인정일진댄.

은연중 세태를 꼬집고자 풍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소가 날고뛰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꺼 놓고 봐야 할 눈앞의 불이다. 구경거리라고 좋아할 게 따로 있다. 그냥 소가 아닌, 부사리라고 생각해 보라. 부사리가 어떤 소인가. 머리로 잘 떠받는 못된 버릇이 있는 성질이 불같은 소다. 투우(鬪牛)처럼 다짜고짜 뿔로 들이받으려 덤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머리 짜고 협동할 일이지 뒷손지고 서 있을 일이 아니다. 이해관계가 없다고, 그게 설령 불행한 일인데도 재미있다고 구경이라고 하고 있어서는 동네 인심이 아니잖은가.
  
제주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나, 제주는 양속(良俗)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울담 너머로 파제 뒤 퇴물 차롱(대 바구니)을 넘기고. “이거 먹어 봅써.” 우영(텃밭)에서 난 패마농(쪽파)과 부루(상추)며, 새우리(부추 또는 정구지) 한 움큼 건네는 이웃 간의 정이 있다. 얼마나 따스한가. 이야말로 공동체로 제주를 키워 온 제주 고유의 덕목이다. 제주는 사람 살맛나는 영원한 우리의 고향이다. 도시락 싸들고 팔도를 뒤져도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놈의 쇠 들럭퀴는 건 구경 좋나.’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으나, 어쩌다 마음을 놓아 버려 일어난 일이리라. 어쩌다 말이다.

‘소 닭 쳐다보듯’하거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 안되는 걸 왜 모를 사람들인가.

정치하는 사람들, 상대의 잘못을 질정(質正) 하려 하지 않고,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구경이나 하는 모습은 참 속 보이고 민망하다. 이 땅에 우리 민주주의가 주춤거렸던 이유다.

사람의 일에는 모름지기 진정성이 깃들어야 한다. 잘못 가고 있는 일이, 바로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고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나서는 마음이 세상을 바로 일으키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 

여야 할 것 없이 나랏일을 뒷손 지고 서서 구경해선 안된다. 요즘 새 정부가 탄생하면서 잘한다고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분명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한국 정치 마당에선 전에 보지 못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잘하는 데 칭찬에 인색하면 용렬한 자로 낙인찍힌다. 국민이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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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은 과거의 실패를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박수갈채에 취해선 안된다. 박수에 취하면 길을 잃는다. ⓒ제주의소리

파격 행보뿐 아니라 대통령이 마음을 열어 나라와 국민을 품고 있다. 체온이 느껴진다. 새가 알을 품듯 그렇게 세상을 품고 있다. 이대로 나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남의 쇠 들럭퀴는 건 구경 좋나’, 그러고 있을 국민이 아니다.
  
다만, 대통령은 과거의 실패를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박수갈채에 취해선 안된다. 박수에 취하면 길을 잃는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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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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