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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민주주의는 밥상에서 시작된다

고용석 news@jejusori.net 2017년 06월 16일 금요일 14:25   0면

[다른 밥상 다른 세상] 성선설과 성악설로 본 민주주의와 음식의 인문학
/ 고용석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한국채식 문화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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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1. 스탠퍼드대 감옥실험은 재학생 중 젊고 건강하며 심리적으로 안정된 중산층 24명을 교도관과 수감자로 배역을 나눠 가상 감옥으로 들여보냈다. 실험이 시작되자 교도관을 맡은 학생들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가상의 수감자에게 끔찍한 고문과 신체적 위해를 가했다. 다양한 성적·심리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실험은 예정기간을 못 채우고 중단됐다. 2. 평범한 악: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전범으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지켜보면서, 아이히만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이점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3.'육식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기계적 환원주의, 실용주의, 시장효율성 등의 이름으로 생명체를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상품화하는 제도적으로 저질러지는 악을 ‘차가운 악’이라 명명했다. 분노하는 뜨거운 악에 비해 알아채기 어려워 분노조차 못한다. /사진 제공=한국채식문화원.

사람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인성을 관찰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은 오랜 철학적 논쟁일 뿐 아니라 그 방식에 따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모든 시스템의 본질적 토대 및 그 운영과 성패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먼저 인간은 고정된 게 아니라 삶을 통해 잠재력을 펼쳐가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의 선악은 동일 차원이 아니라 인간 잠재력의 서로 다른 차원의 의식 수준으로 이해하자. 선악이 뒤섞여 있어 위태로운 차원을 악이라 하고 선은 마치 물과 물결이 다르지 않듯 궁극으로 선악을 초월하고 포옹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단순히 양자선택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로 공자의 두 제자라 할 수 있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반영한다. 순자는 사람이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에게 이익 되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이 선천적이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그대로의 본성이라 한다. 여기서 출발해 후천적 노력과 단련을 통해 인의예지를 얻는 것이라 본다. 그는 인의예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순자의 시각은 모든 인간은 사회성을 결여한 이기적이며 평등한 존재이고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생각하고 사회계약설을 주창한 홉스와 유사하고 스탠포드 감옥실험과 루시퍼효과로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 교수와 복종실험으로 대단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스탠리 밀그램 교수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각은 오늘날 여러 국제정치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설득력 있게 기여해왔다.

순자의 시각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쉽게 악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음을 상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히틀러를 비롯한 역사적 현장에서 왜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명령에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건지, 어떻게 정의롭지 못한 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지, 왜 평범한 사람들이 끔찍한 대량학살을 저지르는지를 설명한다. 이 시각에 초점을 맞추면 무엇보다 인간성이 최악으로 추락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상황을 제한하는 법과 제도가 우선 고려되며 그에 따른 교육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반면 맹자는 인의예지란 내재된 본성이기에 물욕에 탐닉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돌아가, 마치 우물가에 있는 아기를 보게 되면 도움의 손길을 뻗치게 되듯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면 지극히 크고 굳센 호연지기도 천지간에 자연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천적이고 자연스런 본성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시각은 대부분의 영적 전통과 종교, 신화의 가르침과 그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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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가 두려워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에 가는 것을 보고,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소를 살려 보내는 왕을 두고 맹자(BC372 - BC289)는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백성들을 향한다면 그것이 곧 좋은 임금이요 좋은 정치라고 강조했다. /사진 제공=한국채식문화원.

모든 영적 전통은 공통적으로 공자가 말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마음을 아는 것’을 뜻하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강조한다.

모든 존재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선함을 발견함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수양이란 뜻을 정성스럽게 해 본래 선함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자각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 시각에 초점을 맞추면  법과 제도 보다는 개인의 역량과 사람의 잠재력을 쉽게 해방시켜 최상으로 인도하는 문화적 전환이 우선된다.

예를 들면 자유 평등의 천부인권을 선언한 민주주의 이상은 항상 현실과 비교할 때 그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 구성원의 마음습관이 그 수준에 이르는 게 쉽지 않아 어쩌면 그 간극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비극일 런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천부인권은 일종의 신화이며 인간 잠재력이 완성된 공동체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시스템이나 제도라기 보다는 이런 마음을 쉽게 해방시켜 사람의 가능성을 꽃피우게 하는 일종의 문화이며 신화와 현실의 간극을 채워가는 끊임없는 실험이고 학습인 셈이다.

근대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이 선악이 뒤섞여 이기적이며 위태로운 상태가 본성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습으로 인한 것이고 이 관습이 행위자로 하여금 자신도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을 하게한다는 것이다. 깊이 살펴보면 이타주의야말로 인간 특성의 진정한 요소이고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흄의 친구이자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으로 유명한 아담스미스도  인간 내부에 현명함과 연약함이 모두 존재하고 인간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위해 각각 다른 역할이 주어져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이를 통해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창하고 자유시장을 설계한다. 연약함의 소산인 이기심은 악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과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충분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연약함은 방임되어서는 안 되고 현명함의 소산인 법과 정의에 의해 제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가 너무 중시된 나머지, 물질적이고 경쟁적인 이기심만이 마치 인간의 본성인양 인식되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공동선을 도모하는 인간의 능력에 심한 회의가 만연해 민주주의 자체가 병들어 앓아누운 상황이다.

그 결과 양극화와 환경파괴는 물론 지구온난화와 지속가능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와중에서 인류가 과연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가도 회의적인 지경이다. 한마디로 맹자도 순자도 없다. 사람들에게 최상을 인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최악으로 부터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은 현재의 체제의 힘을 이용해 빈곤과 기아,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들이 두각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지구민주주의 생태운동 에코페미니즘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을 이기심이라는 일면만을 보는 체제 속에서 인간의 다른 측면 즉, 다면성을 반영하는 시도들이다. 또한 고대 농경사회의 풍요와 양육의 여신이자 인간 내면의 양육하고 돌보는 본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 철학은 어원적으로  Philosopia 즉 소피아에 대한 사랑 이란 뜻이다)를 회복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류 내면문화의 주요한 상징이자 인간이해의 메타포인 음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음식은 생명 사랑 관대함 축하의 원천이자 은유임과 동시에 통제와 억압 잔인함 죽음의 원천이자 은유이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선택하는가는 자신과 그 문화의 심장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게다가 음식선택을 좌우하는 인식의 질은 유의미한 관계를 찾는 인간의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우리는 어릴 때부터 본인의사와 무관하게 문화나 부모에 의해 끼니마다 동물의 살을 먹을 것을 강제 당한다. 반복되는 식사는 자신도 모르게 생명체를 사물로 보고 상품으로 보도록 훈련한다. 인간과 자연을 도구로 보고 협력과 조화 보다는 경쟁에 익숙케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본성인 소피아(Sophia)를 억압함으로써 인간의 지성 창조력 창의성의 발현을 근본적으로 막는다. 그 결과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 황폐해진 생태계,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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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1.윌터틀 박사가 서울과 광주를 거쳐 부산의 인문학당 백년어 창립 6주년 기념강연에 나섰다. 2.부산 불교 신도회와 불교 법조인회 초청강연. 3.생태유아학회와 부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초청강연. /사진 제공=한국채식문화원.

음식이 문화와 내면의 본성에 미치는 영향과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2년 전 잇달아 한국을 방문한 국제적 베스트셀러 ‘월드피스 다이어트’의 저자 월터틀 박사와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메릴린 조이 교수의 연구를 주목할 만 하다. 두 사람의 연구는 그 방법상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이 많다.

무엇보다 전쟁, 여성차별, 노예제, 생태계 파괴 등 폭력적 가치와 신념의 뿌리에 목축문화와 육식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을 밝히고 육식이 왜 우리 문화의 최대 그림자인가를 설명한다. 먼저 월터틀 박사는 1984년 송광사 하안거에 참석해 비건채식이 고대 아힘사(비폭력)적 삶의 연속이라는 영감을 얻는다. 그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인간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목축혁명을 소개한다. 이 혁명은 2000~3000년에 걸쳐 진행된 인류 역사상 가장 느리고 강력한 혁명이다.

1만 년 전에 문명의 발생지인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 인류는 최초로 양을 가축화하기 시작했고 염소, 소, 말 등이 차례로 가축화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신성하고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생명체는 오랜 기간을 통해 사물-그것으로 축소되기 시작한다. 특히 암컷이 많은 젖과 생식에 관련되다보니 먼저 축소되고 모든 가축이 그 뒤를 따른다. 야생동물조차 가축을 노리는 유해동물로 축소된다. 가축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인간도 덩달아 축소된다. 암컷과 새끼가 먼저 축소되듯 특히 여성과 아동이 빠르게 축소된다.

5000년 전 인류최초의 역사적 기록물에는 공통적으로 억압적 가부장제와 사유재산, 부와 자본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이 등장한다. 자본이란 단어는 소와 양의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카파타’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인류사회에 2가지 제도가 잇달아 발생되는데 하나는 전쟁이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을 가리키는 ‘가비아’는 더 많은 소를 가지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노예화다.

전쟁에 승리한 자는 상대편의 가축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다. 이렇듯 가축화가 가져온 축소와 환원주의 혁명은 전 세계로 퍼져 현재 인류사회의 주류로 자리한 지배적 위계구조를 낳고 오늘날까지 진행 중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의 경제적 토대 및 심리적 기틀도 목축문화에 근간한다.

반면 멜라니 조이 교수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을까’ 에서 보듯 반려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햄버거를 먹는 인간의 모순적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고찰한다. 어떤 고기는 살아있는 모습이 떠올라 메스꺼워하고 어떤 고기는 거리낌 없이 먹는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를 육식주의라 이름하고 그 폭력성을 하나씩 밝혀간다.

첫째, 육식주의를 정당화하는 3가지 신화를 얘기한다. 육식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화는 노예제와 여성차별 등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 신화는 법과 언론, 교육, 정부, 의료계 등 모든 제도를 통해 내면화된다. 둘째, 우리의 인식까지 왜곡한다. 인간 본연의 공감과 자비를 마비시켜 인식을 왜곡 조작함으로써 생명을 사물과 추상으로 보게 한다. 사람들은 육식주의라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연구와 통찰은 결국 음식을 선택하는 내면의 힘으로 직결된다. 이는 차단된 의식과 공감을 온전하게 원상태로 되돌리는 혁명적 행위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변화를 막고 지구환경과 동물의 고통을 줄이며 사회적 정의를 위해서라도 올바른 음식선택이 필요하다. 채식이 의식적인 선택인 반면 사람들은 육식을 선택임에도 질서에 따른 당연한 것으로,, 거기서 오는 자연스러움을 마치 자신의 선택인양 착각한다. 일종의 매트릭스인 셈이다.

매트릭스로부터의 탈출은 목축문화, 육식주의 같이 먼저 이름 붙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자각을 통해 우리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페미니즘이 있고서야 가부장주의의 폭력성을 인식하듯 나중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신념체계가 그만큼 보이지 않고 폭력의 뿌리가 깊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거세게 부는 세계적 비건(완전채식) 열풍은 문화와 사회의 공적담론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우리자신과 문화에 내재한 폭력과 미망에 대한 영적 각성인 셈이다.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보려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노바 바베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간디의 서거 이후 인도의 토지헌납운동을 이끈 비노바 바베는 인간의 자아는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세계에 스며들길 안달하는데  우리가 담벼락을 쳐 자아를 골방에 가두고 죄수로 만든다고 얘기한다.

그가 18년 동안 지주나 자본가에게서 500만 에이커의 땅을 자발적으로 헌납 받아 빈민과 농민들에 함께 나눠줄 수 있는 비결은 이기심의 높은 담벼락처럼 완강한 그들 속에서 마음 깊숙한 곳의 선량함을 향한 작은 문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의지만 있다면 자신의 담벼락 즉 이기심을 극복하고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작은 문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기심과 단점들의 담벼락을 머리로 들이박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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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왼쪽부터) 1. 비노바 바베와 네루 수상. 2. 부단운동. 3.타임지 커버인물. 4. 부단운동. 간디와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진실한 추종자였으며, 간디 이후 인도의 진정한 성자로서 존경받고 있는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1895∼1982). 그는 현실 속에서 이상을 구현한 위대한 실천자다. 그의 대표적인 공적인 ‘토지헌납운동(부단운동)’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의미있는 행동으로써 그의 굳건한 신념과 꾸준한 실천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었다. /사진 제공=한국채식문화원.

그는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인간본성에 기초해 계급과 지역, 성과 종차별 등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담벼락을 허문 사랑과 소통, 영혼의 혁명가였다 물론 밥상위의 진보주의자였다. 진보란 거창한 정치적 방식에서만 오고 이름 불러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은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며 상황은 매우 긴급하다. 오늘날처럼  생명체들이 심하고 무자비하게 조직적으로 수정되고 길러지는 과정에서 대량학대가 자행된 적은 역사상 없고 대량 사육으로 인해 지구상의 자원소모 및 환경오염과 파괴가 이처럼 막대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루 수십억의 동물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매초 1200평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10억 명은 배고파 굶어죽고 10억 명은 배불러 아파죽는 등 그 파괴적 후유증은 인간사회부터 심해에 이르기까지 생태계전반에 걸쳐있다. 그것도 현대사회의 상징인 합리성의 이름으로 제도적으로 자행된다. 마치 제 기능도 못한 채 말라버린 앙상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누구나가 이런 세상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원인 제공자가 우리 자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우리의 밥상에서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깨어있는 삶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한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건강과 지구환경, 생명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마음 살피기에서 출발한다. 매일 끼니마다 시장에서 무엇을 구입하느냐는 일종의 선거이자 투표 행위이다. 

이 일상의 민주주의가 공동체 전체로 확장될 때 그 과정 자체가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구현인 것이다. 이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통해 상식과 심오한 가치가 반영되는 경제구조의 재창조도 가능하다. 지속가능성 위기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선순환을 창출할 수 있다.

과연 민주주의가 오로지 정당과 선거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의 국민시인 휘트먼은 “민주주의 쓸모 있는 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최상의 관계에서 종교 대학 문학 학교 등 모든 공적 사적 영역의 민주주의에서 꽃과 열매로 피어나기 때문이다”고 노래한다.

살아있는 민주주의는 일상과 거시적인 것, 개인과 자연, 사회를 분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우주적 공공성을 담는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고용석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한국채식 문화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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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석은?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를 비롯해, 지구온난화 관련 글로벌 컨퍼런스를 수차례 기획했다. 지구온난화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부산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국제채식연합IVU을 대표해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2005년부터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로 활동하며 현재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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