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 시간여행] (7)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밭담 이야기 

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되고 3주년을 맞이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온 제주밭담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밭담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본 연재는 밭담길을 따라 걷다 만난 우리네 삼촌들에 관한 것이다. 밭담과 함께 섬의 살림을 일구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주 농민들에게, 미처 보물인줄 몰랐던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주밭담의 역사이고, 삼춘들의 살아 온 이야기 속에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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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2리의 돌챙이 하르방 이야기. 무 수확이 끝난 밭담 풍경. ⓒ정신지
석공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해방 전에 태어나 어려운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우연히 석수 일을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했다. 되고 싶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사는 게 어려워 자식들 거느리며 살아가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남보다 힘이 세고 키도 덩치도 크기 때문에 동네 힘꾼으로 소문이 났다. 석공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커다란 돌을 들 수 있는 기본적인 체력이 필요했다. 석공들이 주로 하는 ‘산담’일을 하려면 큰 돌을 산에 들고 가야하는데 그럴 때는 힘 좋은 석공이 대우를 받았다. 

산담은 어떻게 쌓았나요?

산담은 집에 돈이 없으면 제대로 쌓을 수 없었다. 모두가 석공을 불러 산담을 쌓는 것이 아니다. 석공을 부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돌을 이고 가 외담(한줄로 된 담)으로 산담을 두르기도 했다. 일을 부탁한 사람은 산담을 쌓는 석공들에게 돼지를 잡아 후한 대접을 했었다. 석공은 항상 패를 이루어 일을 하는데 인부들이 기분이 좋아야 좋은 담을 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돼지를 잡아주면 그것을 가족들이 나누어 먹기 때문에 산담을 쌓을 적에는 늘 기분이 좋았다. 산담을 쌓기 위한 날은 동네 심방(제주의 무속신앙인)이 정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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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2리 산담의 머들. ⓒ정신지
밭담은 아무나 쌓을 수 있나요?

밭담은 석공들이 쌓은 게 아니다. 내가 낳기도 훨씬 전부터 마을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쌓아올린 경우도 많다. 밑에 놓는 돌을 제주말로 ‘굽자리’라고 하는데, 그 굽이 단단해야 담이 단단하다. 밭담을 쌓는 것에 특별한 기술은 필요 없지만, 돌을 어떻게 놓느냐가 보기와는 달리 어려운 기술이다. 엎어 놓는가, 갈라 놓는가, 세워 놓는가, 이것은 말로 설명이 되는 부분이 아니다. ‘눈기억’ 없이는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밭담의 경우에는, 밭 주인이 쌓기 때문에 농사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 농촌의 일이라는 것은 의외로 복잡한 일이 많다.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생각도 많이 해야하고, 그 때 그 때 순발력도 있어야하고, 응용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밭담을 쌓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수많은 돌을 그냥 쌓는다고 쌓아지는 것이 아닌데 농부들은 농사를 하며 자연스레 그것을 몸에 익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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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2리 석공 하르방, 경칫담이란 이런 것을 가리킨다. ⓒ정신지
제주의 돌 

마을마다 돌이 다르고, 땅마다 돌이 다르다. 큰 돌은 야를 놓고 벌리기가 좋은데, 모든 큰 돌이 그런 것도 아니다. 평평하게 생긴 돌은 미끈하게 잘 깨지기 때문에 쪼개어 쓰기에 좋지만, 울퉁불퉁한 돌은 ‘야’(돌을 깰 때 쓰는 ‘정’)를 놓으면 깨지긴 해도 모양새가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봤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잘 알다시피 제주의 돌은 이름도 제각각이다. 화산돌에는 저마다 다른 특징이 다 있다. 오름을 오르다보면 빨간 ‘송이돌’이 나오기도 하고, 바닷가 마을에는 ‘먹돌’이라는 검은 자갈이 있다. 그에 반해 우리 동네에서 나오는 돌은 거의 모두가 그냥 ‘잡돌’이다. 제주의 돌이라는 것이 구역별로 나눠질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땅 밑에 뭐가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땅 밑에 뭐가 있는지 전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다. 그 때 그 때 상황을 보며 땅을 알아가야 한다. 

함께 일하던 석공들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을에 석공이 많았는데 이제 다 죽고 나만 남았다. 석공은 패를 이루는데, 나와 한 동아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수산1리까지 합쳐 마을에 두 세 패의 돌챙이 동아리가 있었다. 다른 패에는 아직 살아계신 분도 있는데 우리 패 석공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다. 새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시멘트 콩크리트가 건축의 주된 재료가 되다보니, 돌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옛날에는 석공이 귀한 일이었다. 돌을 깨서 집도 만들고 화장실도 만들고 모두 다 돌로 만든 것이다. 내가 사는 저 집도 우리 석공 패 친구들이 와서 삼 일 만에 뚝딱 만들어 준 집이다.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었는데 가족과 살 집이 변변치 않은 것을 보고 친구들이 와서 의리로 만들어 준 집에 아직도 살고 있다. 오래된 집이지만 내가 가진 재산은 저 집과 집 앞에 밭으로 쓰던 땅덩어리가 전부다. 요즘엔 밭일도 안 하기 때문에 저 정도 규모의 밭에서 농사를 해 봤자 취미도 안 된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땅을 물려줬다. 그랬더니 지금 그 땅 위에 돌을 매립해서 새 집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멋진 집을 지었으면 하고 매일 이렇게 나와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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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챙이 하르방 부부. ⓒ정신지

현재의 석공 

지금도 석공이 있다. 석공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돈버는 새 석공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주로 ‘경칫담’이란 것을 쌓는다. 경치 좋으라고 쌓는 담이 경칫담이다. 제주시에 가면 동문로타리 주변이라든지 새로 만드는 큰 건물 주변에 돌담을 쌓는데 그게 경칫담이다. 꼭 옛날에 있던 성담처럼 빼곡하고 멋지게 쌓는다. 전에 있던 방식은 아니지만 요즘 석공이라 하면 그런 일을 맡아 하는 것 같다.

어린시절의 기억

어린시절의 기억을 하다보면, 6살 이전에는 마을에 일본군이 많았다. 괴롭힘 당하던 기억 밖에 없다. 우리 말도 못 쓰게 하고 많이 답답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4.3사건이 터졌고, 우리도 근저 고성으로 피난 갔다. 숨을 곳이 없어서 감자구덩이에 숨은 사람도 있고 내창가에 가서 깊은 굴 같은 곳에 몸을 피하기도 했다. 밤이면 폭도가 나온다며, 사람들은 어디든 가서 숨자고 했다. 시계가 없던 시절이라 별을 보며 별짐작으로 다녔다. 날을 새고 아침이 되어야 집으로 왔다. 그러다가 얼마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성담을 쌓았다.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담을 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돌을 날라야했다. 마을에 있는 밭담은 거의 모두 허물었다. 돌이 모자라니 여기 저기 돌을 다 가져와서 높이 성담을 쌓았다. 성을 쌓으면 중간에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초소를 만들어 번갈아가며 근무를 했다. 우리 형도 처남도 4.3사건에 돌아가셨다. 난 어렸기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은 거다. 그렇게 남자들이 다 죽거나 남은 남자는 모조리 군대에 끌려가서 동네에 홀어멍만 가득했다. 남은 홀아방들이 동네 밭을 다 갈았을 정도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본격적으로 마을 사람들 일을 돕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좀 들어서였다.

농사

제대하고 17세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 때부터 밭농사를 했다. 퇴비도 없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조, 보리 등을 했지만 얼마 안 가 마을 사람들은 밭을 갈아엎고 귤 농사를 시작했다. 귤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농사는 더 이상 짓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거의 귤 밭으로 변했다. 표선리나 수산리는 땅의 질이 비슷하다. 구좌읍처럼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여기는 비가 오면 물이 많이 불기 때문에 농사가 힘들다. 그래서 피나 조를 많이 심었다. 우리 지역은 ‘뜬땅’이 많았다. 물이 잘 고이는 질퍽질퍽한 밭을 ‘뜬밭’, ‘뜬땅’이라고 한다. 비 오면 신발에 진흙이 가득 묻는 그런 땅이었다. 

한 쪽 눈을 앗아 가버린 석공의 일  

담을 쌓던 기억을 하면 죄다 고된 기억 밖에 없다. 내가 지금 눈 한 쪽이 안 보이는데, 실은 이것도 담을 쌓다가 실명된 것이다. 담이라는 것은 누차 설명하듯, 이걸 여기에 놓으면 된다는 것을 늘 머리에 넣고 항시 눈여겨 봐야하는 복잡한 일이다. 힘의 한계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너무 욕심을 부려서도 되는 일이 아니다. 눈을 실명 했을 때, 나는 혼자서 무리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과하게 일을 하면 탈이 나는 법. 나의 아내도 밭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지금은 허리를 쓸 수가 없다. 아무리 잘 할 수 있는 일도 적당히 해야한다. 몸이 망가지면 일을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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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하르방. ⓒ정신지
석공으로 살며 얻은 가르침 

제주에 석공은 이제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산담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밭담은 그대로 있지만 그건 각자 밭 주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엔 밭담이 허물어져도 쌓지를 않는 것이 문제다. 쌓을 사람들이 나이 먹고 하나 둘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석공을 전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 온 일을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배워서 석공이 되어야 할 텐데, 아무도 이 일을 배우러오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모두가 시대에 맞추어 그때그때를 살아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해 온 일에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역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 온 일 중에, 후세에 물려주기로 처음부터 작정하고 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저 일상이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돌로 돈을 만들어 살아온 거다. 그렇게 살다 보니 가족도 불어나고 손주 자식을 합치니 이제 스무 명이 넘는다.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훌쩍 가족이 커진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만약 돌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용하도 좋지만, 너무 욕심은 부리면 안 된다. 아까도 말했듯 돌을 다루려면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무리를 하면 안 되는 법이니까. 무리하면 꼭 탈이 난다. 그것이 내가 한 쪽 눈을 잃으면서 까지 석공으로 일해 얻은 큰 가르침이다.  /정신지 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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