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5) 정월 초하룻날 먹어 보면 이월 초하룻날 또 먹으려 한다

* 정월 초하를날 : 음력 정월 초하루 곧 설날
* 방 : 보아. 제주방언으로 ‘~해 보다’의 뜻, 시험을 나타내는 조동사
* 먹젱 :먹으려, 먹자고‘의 제주방언 

한 번 재미를 보면 자주 하려 든다는 뜻이다.

제주 속언에 이와 딱 맞는 말이 하나 있다. “촘지름 혼 번 먹어난 고냉이 또 먹젠 헌다.”

참기름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만질만질한데다 고소한 향이라니. 그 참기름 맛을 한 번 들이면 쉽게 끊지 못한다는 말이니, ‘정월 초하룰날 먹어 방~’과 거기서 거기다. 명쾌한 빗댐이다.

한편 생각거니와, 호의호식하는 것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여러 풍조며 관습, 정치판은 물론 대소 범절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할 법하다.

우선 비근한 예로,

아이 버릇 길들이는 데서도 늘 경험하는 일이다. 좋은 반찬만 먹는 아이는 늘 맛깔스러운 것만 찾는다. 모르는 사이에 입이 높아져 있다. 

요즘은 음식에서 우리 전통이 빛을 잃어 간다. 양과만 먹는 아이에게 ‘우리 떡’은 안중에 없다. 서양식 옷에 익숙한 아이에게 한복 따위는 눈 밖이다. 의식주에 걸쳐 서양물이 짙게 들어 버렸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얼굴만 한국인일 뿐, 먹는 음식에서 입는 옷 자는 집, 사고와 인식체계까지 서구화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에 더해 얼굴까지 뜯어 고쳐 서양이니 이런 만망할 데가.

정월 초하룻날은 설날이다. 못 살던 시절 명절만큼 먹거리 풍성한 날이 있으랴. 조밥 보리밥 같은 서속밥도 없어 못 먹던 시절, ‘곤밥’을 받아 앉는 날 아닌가. 곤밥, 보기만 해도 눈이 부셔 입안에 침부터 돌았다. 곤밥은 흰쌀밥이고 이밥이기 때문에. 곤밥은 이제,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회상의 공간에서 돌이켜보는 한 토막 눈물겹던 옛 얘기가 됐다. 

이건 통속에 매여 사는 장삼이사의 소박한 얘깃거리에 불과하다. 사람에겐 한 번 길들면 지속적으로 가는 묘한 타성이 있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어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게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관계망을 흔들어 놓는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판을 기웃거리게 된다. 

‘가짜뉴스’란 게 있다. 전엔 들어 보지도 못한 말인데, 지난 대선을 전후에 수없이 회자돼 온다. 미국 대선 시, 친 트럼프 성향의 악의적인 가짜뉴스가 쏟아져 나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엉터리 뉴스사이트, SNS의 글을 긁어모아 적절히 짜깁기하고 윤색(潤色)하는 식으로 가짜뉴스가 생산된다.

우리 19대 대선 때도, 최대 이슈가 된 게 가짜뉴스였다. 악의적인 ‘~카더라’식으로 SNS에 퍼뜨리면서 무심결 국민들을 혼동 속으로 쓸어 넣어 판단을 흐리게 한다.

지난번 문 대통령 방미 때만 해도 이 가짜가 판을 흔들었다. “대한미국 방명록은 가짜뉴스“라고 몰아가는 가짜뉴스가 등장한 것이다.

“한미동맹, 평화와 번영을 위한 위대한 여정! 2017.6.29. 대한미국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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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9일 미국 백악관 방명록에 남긴 글. 출처=트위터.
문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에 블래어 하우스 방명록에 남긴 ‘대한미국’ 오자(誤字) 관련 보도에 대해 말들이 무성했다. ‘대한미국’ 방명록은 포토샵으로 조작한 가짜뉴스라는 주장이 ‘원본’이라는 방명록 사진과 함께 퍼진 것이다.

문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의 기사를 ‘가짜뉴스’로 보이게 하기 위해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공격하는 뉴스가 등장했으니, 고것 참, 고약한 일이다.

‘대한미국’이라 쓴 표기가 언론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가 대통령의 실수가 맞다고 확인했다. 대통령 자신이 현지에서 “실수입니다”라고 말했다고도 밝혔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국호를 잘못 기재했다.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실수입니다.“라는 글까지 올렸다.

지난 얘기를 들추는 이유가 있다. 한 네티즌이 문제를 제기했다. “누가 포토샵으로 의혹을 제기했을까요? 일베? 박사모? 안빠?”

왜들 이럴까. 선거 때만 허풍떨었으면 됐지 이렇게 질질 끌고 가야 하나. 야권 한 정치인의 의미 있는 비판에 가슴 뜨끔했다. 

“골수 친박이 보이던,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뉴스는 가파르게 범람한다. 이용자는 선택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눈길을 끄는 뉴스가 곧 팔리는 뉴스가 된다.

가짜뉴스를 흘려 쏠쏠 재미를 봤던 걸까. ‘정월 초하룻날 먹어 방 또 먹젱’ 하는가. 의도적으로 특정인, 특정단체를 옹호·비판할 목적으로 쓰는 가짜뉴스는 사라져야 한다. 이번 방명록만 해도 그렇다. 그걸 보도한 언론과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대중을 오히려 ‘적폐’로 몰아가기 위한 일련의 장난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가짜는 진짜가 아니다. 위작(僞作)이거나 가작(假作), 한마디로 짝퉁이다. 가짜가 판치는 나라는 믿음이 없는 나라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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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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