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61) 와시다 키요카즈 『듣기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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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시다 키요카즈 『듣기의 철학』
오래 전에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 나와 강연을 하면서 그랬다. 철학자가 많아서는 안 된다고. 철학자는 너무 말이 많다고. 말 많은 철학자들이 많아져서는 곤란하다는, 말 많은 철학자의 말. 그 말이 맞을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시 묻자. 철학자는 정말 말 많은 사람인가?

우리는 대개 철학자란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적어도 철학자라면 범인들이 알지 못하는 난해한 개념들의 언어를, 우리와 무언가 다른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이들 아닌가. 많은 철학자들은 아니라고 항변하겠지만, 이런 비-철학자들의 생각도 반드시 무의미한 선입견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철학자 와시다 키요카즈(鷲田淸一)는 철학자들을 향한 세상의 그런 인식과 비판을 잘 새겨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듣기의 철학』에서 잘 말하는 철학이 아니라 잘 듣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철학의 수다스러움에 대해 용서를 빌고 다른 철학의 그림을 그려본다. 애초에 철학은 길거리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나아가 임상의학과 임상심리학이 있듯이 철학에도 임상철학(臨床哲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책도 이른바 ‘비-방법의 방법’인 에세이를 지향한다. 다른 많은 철학서들처럼 철학자의 책과 사상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저자의 실제 체험과 대화 내용, 그리고 타인들의 실제 체험의 기록까지 현실에서 길어 올린 에피소드들이 사상과 함께 나란히, 혹은 그 사상들을 포개어 감싸고 있다. 

철학적 대화를 할 때는 ‘말하는’ 행위 이상으로 듣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나는 철학을 ‘임상’이라고 하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에서 접근,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시도’로써 철학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54면)

임상철학의 도전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생기는 공시적인 관계 속에서 철학적 사고가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일(sym-pathy)’로써 활동을 개시하면서 시작된다. (65면)
이 책은 저자의 전공인 철학으로부터 출발한 철학 책이 분명하다. 하지만 반드시 ‘듣기’와 ‘임상’의 자세가 철학에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 이외의 다른 학문 분과들 또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영역들에도 ‘듣기’와 ‘임상’의 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환대(hospitality)’의 직업을 가진 교사, 의사, 간호사, 그리고 여행 및 관광 종사자나 판매업 종사자 같은 다양한 서비스직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상당히 의미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자기 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자기만의 ‘철학’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서문으로 쓰인 「타자에게 닿기 위한 철학」에서 와시다 키요카즈는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들려준다. 어느 학교에서 신선한 달걀을 분별하는 과학 지식을 배운 학생이 두 개의 달걀 중 어느 쪽을 먹겠느냐는 시험 문제를 풀었다. 그 아이는 노른자가 높이 솟아오른 신선한 달걀이 아니라 반대쪽을 골랐다. 문제에서 틀린 아이는, 신선한 달걀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지만 오래된 쪽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를 둔 아이는 요리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잦았고 그 질문은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과학 시험은 우리 실생활과 전혀 무관한 문제였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학교와 교육의 문제를 성찰하게 된다. 과연 지식은 삶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질문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지식과 배움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물론, 다른 개별 학문이나 각 전문 영역도 제도화된 언어와 관습, 그리고 소통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디에서나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육과 더불어 나의 또 다른 임상의 현장인 문학으로 돌아와 본다. 와시다 키요카즈를 따라 ‘임상 비평’이란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론 비평을 예외로 한다면, 비평이란 본래 현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면 임상 비평이란 말은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한국의 문학 비평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지나치게 특정한 현장(문학 출판, 더 정확히는 출판사의 이익과 문단의 관습)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또 다른 현장, 즉 실제 문학 작품과 책을 골라 읽을 독자들로부터 유리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성찰적인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이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비평은 비평가의 감식안과 전문가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할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비평적 말하기를 잘 듣는 것으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문학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갈증을 풀어주는 ‘임상적 실천’이 전문적 지식과 유별난 감수성의 과시나 출판사와 문단의 관습, 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실제 ‘읽기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방향 전환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잘 듣기의 비평>이야말로 이 시대의 문학 비평이 존속할 수 있는 유력한 존재 방식이 될 수 있다. 본래 비평이란 타인의 텍스트를 환대하여 읽음으로써만 가능한 소통의 예술이다. 귀의 예술인 비평은 ‘듣기의 철학’을 만날 때야 비로소 진정한 비평이 될 수 있다. 

▷ 노대원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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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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