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62) 김명희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 /서영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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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희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귀환』2017, 한울아카데미.
오늘 소개할 책은 두께와 내용에서 독자를 압도한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는 것만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위논문이 요구하는 건조한 형식과 촘촘한 인용 표시만으로도 책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저자가 엄청난 양의 독서의 결과를 벽돌 쌓듯 차곡이 쌓아 놓았으니 본문만 543쪽에 분량만으로도 웬만한 용기 없이는 쉽게 책을 열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대중적이지 못한’ 책을 전문연구자가 아닌 독자를 상대로 한 글에서 굳이 소개하는 이유를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식’과 ‘과학’에 대해 도전한다. 흔히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표준적인 과학관을 법정에 세우고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라는 소수만 사용하는 개념어가 주는 거리감이 매우 크지만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는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우리들 일상에서 복잡한 현실과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이해관계를 단순화된 변수들 사이의 인과관계로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과학적’이라는 인가를 받는 것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논쟁에서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원자력 마피아’들은 정부의 에너지 정책, 폐기물 처리와 원자로 폐기에 드는 비용, 사람들이 느끼는 위험은 배제한 채 아주 건조한 변수들 사이의 조합으로 안전성과 경제성을 도출해 낸다. 경제학자들은 일상의 고통을 숫자로 표시된 수많은 지표들 아래로 밀어 넣어 보이지 않게 한다. 복잡한 변수들과 요인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처음부터 복잡한 메커니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분리시킬 수 있는 ‘신공’만이 과학적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 우리가 겪는 좌절의 목소리는 그 엄청난 과학의 권위 앞에 정책적으로 전혀 반영할 가치가 없는 몸부림과 아우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가까운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요즘 제주시 모처의 관광단지 건설 허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표준적인 과학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개발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경제적 이익이다. 국책개발사업의 경우도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비용편익분석과 예비타당성조사의 핵심도 경제성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성의 기준에 비추어 독립된 변수로 인식될 수 없는 요인들은 거의 무시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공간이 지역 주민들에게 가지는 정서적 의미는 숫자로 측정될 수 없기에 비과학적이며 그래서 고려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생태적 가치와 역사·문화적 가치도 무시되긴 매한가지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단순화된 사고를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걸까? 복잡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우연과 필연이 연속하며 만들어내는 자연과 인간사회의 복잡한 관계들을 평면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찍혀 있는 점들 사이를 연결하는 것만을 과학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과 삶의 대부분을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몰아내고서야 얻게 되는 ‘과학성’은 매우 빈곤하다. 하지만 이렇게 협소한 과학의 기준은 자연과 사회의 얽힘으로 만들어진 우리네 세상을 읽어내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몰아세우는 권력의 촉수에 장착되어 있는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다. 결국 ‘협소한’ 과학성은 스스로가 과학의 영역에서 몰아낸 ‘정치적인 것’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실증주의 비판이 조준하고 있는 또 다른 과녁은 3차원의 공간을 평면으로 간주하는 천박한 존재론 비판에 멈추지 않는다. 천박한 존재론은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사건들 너머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다. 사건들을 발생시키는 구조적 조건을 분석하고 비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의 관심은 단순한 사건들로 치부되는 것들이 가지는 구조적 원인으로 옮겨간다. 이러한 태도는 ‘집-없음’, 즉 ‘노숙’의 문제와 ‘세월호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에서 빛을 발한다. 세월호에 대한 저작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이 될 커다란 외상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분야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학문적 반성이 제출된 바 있지만, 세월호 참사의 발생 원인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 프레임은 ‘해상 교통사고설’을 위시한 사고-보상 프레임이었다. 2016년까지도 ‘세월호 참사=교통사고’라는 프레임은 세월호 참사의 성격은 물론, 304명이라는 생명을 수장한 사인(死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물론, 정부의 사후 정책 모두를 암암리에 규정하고 있다.”(519쪽)

“반대로 실재론적 견지[실재론은 저자가 실증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론적 입장이다.]에서 구조와 기제들은 실재의 더 심층적인 수준에 존재한다. 특정한 인과기제는 상황에 따라 작동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작동되더라도 상쇄 메커니즘에 의해 예기된 결과가 현실의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건과 경험을 야기한 인과적 힘의 존재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개별 사건은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의 작용이나 발현이며, 거꾸로 구조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계기이자 단서가 된다. 포스트 세월호 국면의 지식-정치는 이러한―암묵적인―경험주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범람하면서, 납득 불가능한 사건과 경험의 원인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과 해명의 노력이 봉쇄되는 특징을 보인다.”(521)

저자는 평면화 된 현실 인식은 세월호 참사를 ‘사고-보상 프레임’에 가두고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개인의 의료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이야기한다. “외상을 유발한 사회적 과정과 선행 사건을 개별화”하는 것은 치유의 과정을 “항우울제 약물 치료와 인지-행동 요법”으로 협소화하는 것이다. “병증에 대한 부각은 불가피하게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장소 역시 개인에게 국한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고통을 다루는 이 환원주의적 접근법의 위험성은 행위자들이 경험한 고통을 초래한 폭력적인 사회 조건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524-525쪽)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협소한 과학관에 기댄 전문가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분석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간주함으로써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가 설명되는 과정에서 반영되어야 하는 희생자들 자신의 상황에 대한 해석과 반응은 인과적 설명 과정에서 밀어낸다.

세월호만 그렇겠는가? 강정 해군기지 건설 역시 구조적 문제로 접근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보상의 문제로 강정의 주민들을 개별화했으며, 그들이 겪는 고통을 개인의 차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과정은 전문가들의 (협소한, 그래서 왜곡된) 과학적 견해에 근거해 사람들을 국가 전체의 이익에 반해 개인적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몰아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 트라우마는 다시 한 번 개별적으로 치유되거나 금전적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문제가 될 뿐이다. 제2의 세월호, 제2의 강정은 또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500쪽을 넘을 때까지 독자를 압도하는 지식과 정보의 양은 매우  독자를 매우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능력 있는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 둔 ‘과학’이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고통을 대안적인 과학의 시선에서 읽는 것은 학문적인 논의가 현실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이 책이 미덕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실증주의의 얕은 지식관과 협소한 과학관을 비판하기 위해 소환한 맑스와 뒤르케임의 고전사회학을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포괄하는 과학적 실천이요 지식구성 과정일 텐데, 그 동안 논의되어 왔던 맑스와 뒤르케임 이론의 내적 모순을 부정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 화해하기 힘들었던 이 두 대가의 차이를 부정함으로써 완결된 ‘실재론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이러한 목적과 부합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증주의와 전문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흠결 없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통합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저자가 원하는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에 도움이 되기보다 장애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분명 21세기의 새로운 과학은 협소하고 얕은 인과관계에 기댄 전문가적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듯이 이러한 ‘넘어서기’는 사건의 경험을 넘어서는 심층적 구조에 대한 탐구를 향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강력하게 구성된 또 하나의 ‘과학’을 통해 성취될 수는 없다. 저자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과학에게 맡겨진 새로운 책무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건의 경험을 넘어선 구조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문제들에 대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과학(적 실천)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고 말이다. 첫째, 과학적 지식 구성 자체가 사회적 실천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토대를 해명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강한 존재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 그리고 언어는 언제나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주어야 한다. 맑스와 뒤르케임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셋째, 앞의 철학적 근거 위에 우리들 삶의 체험을 경험주의적 인과분석에 의해 법칙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주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넷째, 드러내 보여주기의 과정에서 형성된 실천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이 협소하고 평면적인 과학관에 기대어 유지되고 있는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실천적 지식이 없는 과학적 지식은 공허하고, 과학적 지식이 없는 실천적 지식은 맹목’이지 않을까? ‘대중적 지성’의 시대, 과학은 우리 바깥, 우리의 위의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져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과학적 실천은 그들의 손에 독점되어 있는 ‘과학’을 되찾아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서영표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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