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 서영표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한국의 대학이 진리추구와 비판정신의 장이어야 한다는 대학정신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박정희의 철권통치와 전두환 폭압정치의 시대 학생들은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대학의 중심인 교수들은 이러한 저항에 동참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지지하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을 뿐이었다. 억압적인 체제 아래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외로운’ 학문연구에 헌신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목숨을 내걸고 독재에 맞섰던 ‘제자들’ 앞에서 꺼내기에는 조금은 ‘뻔뻔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그 시절 대학은 교수들이 아니라 학생들 덕에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었고 대학이 상징하는 ‘자유’와 ‘진리’ 추구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로 80년 광주의 정신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1987년의 민주항쟁으로 분출할 수 있었다. 최소한 대학은 불의에 맞서는 저항의 근거지였고 그 힘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들어선 정부들은 국가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를 고양하며 시장의 힘을 제어하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국가가 철수하는 것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했다. 민주주의는 역동적인 것이고 단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소란스럽지만 생산적인 과정이어야 했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시장에서의 사적인 이익추구, 그리고 경쟁과 동일시되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의 한국사회는 모든 것이 자본으로 간주되고 상품으로 통용되는 그런 사회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특정한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얻어지는 정체성은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지역의 주민, 어떤 회사의 노동자, 학교의 학생 등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정체성은 개인이 ‘나’가 아닌 ‘우리’로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엔 그걸 가르치는 학원까지 등장했다는 ‘인성’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사회적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전통과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주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공통의 귀속감과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문화적 안정감이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로 오도된 ‘민주화 시대’에 문화적 정체성과 연대의 망은 해체된다. 오직 물질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화폐적 가치만이 숭상된다.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고객과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한다. 삶은 기회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에 따른 비용은 개인이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논리로 환원된다. 당연히 경쟁의 원리가 온 사회를 뒤덮는다. 일상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투자(투기) 논리가 지배한다. 새로운 가치를 전혀 창출하지 않는 주택과 토지 거래가 경제를 지탱하는 중심이 되어 버렸다. 은행은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유동성 공급보다는 이자놀이 하는 기관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텔레비전은 보험과 대출 광고로 가득 찬다. 

이런 나라에서 학문의 가치와 비판정신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도, 권위주의와 물질주의로의 경도를 비판하는 것도 더 많은 돈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비용’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학을 취업 자격증을 취득하는 학원정도로 생각하도록 교육받는다. 교수들은 학문적 열정을 가진 연구자에서 직업인으로 전락해간다. 이것은 대학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증상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처방을 ‘대학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요하고 있는 정부다. 정권을 장악한 집단은 시장을 종교처럼 맹신하는 사람들이다. 시장의 원리가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자기 파괴적 노선에 대해 최소한의 비판을 제기하는 대학도 마뜩하지 한다. 말을 잘 듣게 길 들이고 싶어 한다.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대학도 시장의 원리를 수용해야 한다. 경쟁과 승자독식의 원리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공적 기구로서 대학을 지원하는 것은 투자(investment)가 아니라 지출(expenditure)로 간주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가능한 줄이는 것이 좋은 비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비용 또는 지출로 생각되면 은행이 돈을 빌려주었을 때 담보를 잡고 다달이 이자를 가져가듯이 끊임없이 감시하고 성과를 보고하도록 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된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다. 대학에 돈을 지원하면 그 돈이 허투루 쓰이는 것은 아닌지 명확하게 감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연구자금을 횡령하거나 남용하는 교수들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생각은 확신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자. 교수들이 연구비를 착복하고 횡령하고 남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장에 대한 맹신이다. 시장맹신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사회적 비용은 냉혹한 현금계산의 논리가 ‘도덕적 책임감’과 ‘성찰적 반성’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모두 사회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비생산적인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런 물질만능주의가 대학에까지 넘어 들어온 것이다. 교육부가 들고 나온 개혁은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개혁하기보다는 개혁의 이름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대학의 도덕성과 성찰성마저도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미 대학교수들의 연구역량을 양적으로 평가된 논문 편수에 따라 ‘계산’하고 교수들 사이에 경쟁을 조장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연구는 돈줄을 쥐고 있는 연구재단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연구의 성과는 촘촘하게 만들어진 양적인 성과보고의 틀에 맞추어져 진행된다. 대학들도 여기에 부화뇌동한다.  연구역량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적 성과를 돈을 주고 거래한다. 연구업적인 뛰어난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액수 안에서 서로 경쟁하도록 조장한다. 

175034_199328_3504.jpg
▲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연구의 질을 떨어뜨린다.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정해진 기간 내에 ‘수량’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적 기준에 근거한 ‘돈 장난’이 학문공동체를 붕괴시킨다는 것에 있다. 처음부터 한국 대학에 온전한 의미의 학문공동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구업적이 화폐적 보상으로 환원되고 교수들 사이의 무한경쟁으로 치닫게 되면 그나마 존재하던 학문공동체의 근거마저 무참히 파괴되는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 담론과 쟁점>에 게재됐던 '비판정신의 실종과 민주화운동 세대의 이율배반'을 재편집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