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7시 중앙성당서 기념미사·표석 제막식…박성룡 추진위원장 “벅찬 감동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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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두시위 성공, 그리고 시국토론회 1987년 6월21일 중앙로에서 최초로 가두시위를 성사시킨 후 제주대에서 도보로 행진해 내려온 대열과 합류해 남문로터리에서 즉석 시국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1987년 6월,
참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은 활화산이 되어 폭발했다.
밤에서 낮으로, 골목에서 광장으로, 한숨에서 함성으로
6월의 거리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30년이 흐른 2017년,
역사는 우리들 또 다시로 거리로 불러들였다.
박종철, 이한열이 흘린 피로 만든 민주주의가 위태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세력이 국정을 농단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30년 전 6월 투쟁의 주역들은 다시 아들딸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는 ‘헌법 제1조’를 목 놓아 함께 외쳤다.
마침내 박근혜 국정농단 세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87년 6월 항쟁과 2017년 촛불항쟁은 그렇게 다시 만났고 닮아 있었다.

제주지역에서 30년 전 6월 항쟁의 벅찬 승리의 감동을 기억하고, 후세들과 함께 하기 위한 기념표석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최근 제주에서 30년 전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모여 ‘87년 제주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표석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박성룡씨(제주4.3평화재단)가 이끌고 있다. 81학번인 박씨는 군 복부를 마치고 1985년에 복학, 1986년 제주대 가톨릭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한다. 그리고 1987년 천주교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아 제주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나서게 된다.

그런 그에게 있어 87년, 중앙성당은 각별한 곳이다.
서울에 명동성당이 있다면 제주에는 중앙성당이 있었다. 1987년, 한국사회 민주화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었던 ‘6월 항쟁’의 제주지역 근거지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중앙성당이다.

‘87년 제주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표석’이 세워질 곳이 바로 이곳, 중앙성당이다.

30년 전 진압경찰과 시위대 사이를 갈라줬던 담벼락은 없어졌고, 성당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학생들이 밤샘농성을 했던 성당과, 사제들이 시국 단식농성을 진행했던 가톨릭회관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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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룡 ‘87년 제주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표석 설립 추진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30년 전, 당시 복학생 박씨는 천주교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으며 제주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물론 제주지역 학생운동이라고 해봐야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할 때다.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가 발표된 후 제주에서도 서서히 투쟁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다. 서울 등 육지부 대도시에 비하면 한참 늦긴 했지만.

이 같은 투쟁의 열기에 불을 당긴 게 5.18광주항쟁(당시 정권은 ‘5.18사태’로 규정) 7주기를 앞둬 천주교제주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가 개최한 ‘5.18광주학살 사진전’이었다.

박 회장이 어렵게 ‘광주5.18사진집’을 손에 넣게 되고,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대통령 욕만 해도 잡아가던 시절, 중앙성당이라는 성역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씨는 “5.18사진전과 함께 제주교구 신부 12명이 4.13호헌조치에 항의하는 시국미사와 함께 단식기도농성을 벌이게 되는데 제주에서 6월 항쟁의 투쟁수위를 한 단계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홍충수 신부를 비롯해 12명이 가톨릭회관에서 5박6일에 걸쳐 ‘단식기도 농성’을 전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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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성당은 87년 6월항쟁 당시 제주지역 투쟁의 근거지였다. 이곳에 ‘87년 제주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표석’이 세워진다. 박성룡 추진위원장이 87년 당시 학생들의 철야농성과 사제들의 단식농성이 진행됐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후 중앙성당은 제주지역 시위대들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보루’였다. 6월 항쟁이 최고조로 뜨거웠을 때 근거지도 바로 중앙성당이었다.

그해 6월22일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교문진출을 시도, 경찰저지선을 뚫고 시내까지 약 8㎞ 구간을 행진하자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시위대는 중앙로터리에서 시국토론회를 개최하며 투쟁 열기를 끌어올렸지만 그대로 해산할 경우 투쟁의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었던 상황. 이 때 시위대를 중앙성당으로 이끌며 성당 측에 철야농성을 할 수 있도록 제안한 것이 바로 박씨다.

박씨는 “당시 성당은 그야말로 성역이었다. 경찰이 최루탄을 경내에 쏠 수 없는 분위기였다”면서 “성당 측이 철야농성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번 투쟁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날 고창훈 제주대 교수는 ‘민주화의 대열에 동참하며’ 제하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시위대들 사이에는 그야말로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충만했다.

이후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이 진압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할 때도, 제주대 학생 김윤삼씨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실명을 할 때도 투쟁의 근거지는 중앙성당이었다.

6월 항쟁의 승리 여세를 몰아 제주에서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제주본부’가 결성된다. 박씨는 국본 초대 총무국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박씨는 6월 항쟁 30주년 기념표석 건립에 대해 “30년 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눈물 쏟고, 지랄탄에 쫓기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욕된 역사에 꿋꿋이 맞설 수 있었던 정의로움이었지 않나”라면서 “이번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도 30년 전과 똑같다. 6월 항쟁 세대와 박근혜 탄핵 세대가 다르지 않다. 이번 기념표석 설립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세대관통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87년 제주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표석’은 중앙성당 내 성당과 가톨릭회관 사이에 터를 잡게 된다. 표석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은 십시일반 모았다.

표석은 제주현무암 자연석(가로 90㎝×세로 70㎝)에 동판을 부착한 형태다. 자연석 조각은 김남흥 작가(북촌돌하르방공원)가 재능 기부했다.

D-day는 27일이다. 터를 제공한 성당 측도 표석 설립취지에 공감해 기념 미사까지 집전키로 했다. 천주교제주교구 역시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셈이어서 ‘자축’의 의미도 있다.

미사는 오후 7시부터 진행되며 미사가 끝나면 오후 7시30부터 표석 제막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제막식에는 87년 제주국본 공동대표였던 고창훈 제주대 교수와 양영수·임문철 신부 등 6월 항쟁의 주역들과 5.18기념재단 및 부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박 추진위원장은 “30년 전 같이 분노하고 울분을 삭이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故 김영란, 故 오근수, 故 정공철 동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슬프고 안타깝다”며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가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동지들과 오랜만에 만나 가슴 뜨겁고 간절했던 우리들 20대의 생생한 기억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초대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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