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대학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다. 학문적으로 주어진 정당한 권위가 아니라 관행적으로 주어진 근거 없는 권위가 민주적인 질서를 압도하는 것이 ‘권위주의’다.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몸에 새겨진 권위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던 지적 엘리트주의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70-80년대 교수들을 향해 외쳤던 자신들의 목소리는 정당한 비판이었지만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학생들의 온건한 비판조차 근거 없는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대학이 송두리째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하고 학문이 권력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현실을 방관하고 방조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닐 듯하다. 

스스로의 협소한 시야와 둔감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교수집단의 가장 ‘만만한’ 불평 대상은 정부, 즉 교육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교육부는 대학을 권력에 길들이고 돈의 노예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교육부를 욕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교육부와 거의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너나 할 것이 없이 교육부의 숨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소리 높여 비판의 목소리를 토해 낸다. 그런데 정작 행동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교수들이 교육부의 수족 노릇을 하는 총장과 보직 교수들을 욕하지만 그들이 교육부의 ‘아바타’가 되어 도입하는 정책을 저지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부의 ‘작태’를 인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정도의 사리분별력은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서서 불이익을 받고 싶지는 않다. 학문적인 권위와 도덕적 우월감에 상처를 받았지만 교수는 아직은 괜찮은 직업이지 않은가. 

이렇게 수동적인 이유는 이미 시장화 된 대학의 논리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동료 교수들은 대학의 시장화에 맞서 싸워야 하는 ‘동지’이기보다는 성과급연봉과 연구비 수혜를 위해 다퉈야 하는 경쟁자들이다. 한 쪽에서는 대의를 말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질시와 시기의 눈초리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지식상품을 가공하는데 열중한다. 

역시 비참한 현실이다. 하지만 교수들 다수는 생각만큼 비참해 하지는 않는다. 교수라는 위치에서 이렇게 저렇게 훈수를 두고 논평을 하고 비판을 할 대상이 너무 많다. 기업인들과 정치인들, 연예인들과 명사들까지. 그리고 기성세대가 된 자신들이 누렸던 대학의 자유정신 상실의 희생자인 학생들을 비난한다. 보수적이고 순응적이고 충분히 비판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교수들의 책임이 아닌가? 기성세대로의 일원으로, 선생님으로 스스로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는 엘리트주의와 몸속에 스며든 권위주의가 학생들을 향한다. 여기에 ‘우리 때는·····’이라는 천박한 ‘아재코드’가 더해진다. 

지금의 대학교수 집단은 권력에 휘둘린다. 돈에 약하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교수라는 직함의 ‘권위’를 먹고 산다. 민주주의는 고담준론을 논할 때나 있는 것이지 스스로에게는 잘 적용이 안 된다. 학생들을 민주적으로 대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도록 이끌지 않으면서 비판적인 정신을 잃었다고 개탄한다. 비참한 스스로의 처지를 알지 못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분명 대학 교수들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 줄을 잘 서고 돈 냄새를 잘 맞는 능력에서 오는 ‘억지로 만들어진’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권위는 권력의 줄이 끊어지고 돈줄이 마르면 사라진다. 그래서 한 번 권력과 돈에 맛을 들이면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걸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것일 게다. 교수집단이 추구해야 할 권위는 ‘줄’과 ‘돈’에 의해 유지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지적 노력에서 얻어져야 한다. 모든 학문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비판적 성찰을 위한 간격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것도 위험하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완전한’ 격리보다는 학문정신 그 자체를 상실한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판치는 현실이지만 대학이 학문적 권위를 찾기 위해서는 ‘순수’의 변명 뒤에 숨은 비겁함도 질타해야 한다. 

지식의 생산은 언제나 이론적 체계와 분석의 대상 사이의 ‘긴장’ 아래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 긴장을 회피하는 순간 지적 유희나 교조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지식생산 과정의 ‘긴장’은 과학적 담론과 일상적 담론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지탱 될 수 있다. 지식은 동료 학자들의 엄격한 학문적 잣대를 견뎌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지식은 학문공동체의 형성과 그 안에서의 치열한 논쟁에 의해 깊어진다는 점이다. 흔히 ‘학파’라는 부르는 학문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그 안팎에서 치열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내세운 근거 없는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선배세대 연구자들에 대한 비판은 터부시하는 낡은 문화를 벗어난 학문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안정적인 지위가 주는 유혹을 넘어서 스스로를 현실, 대중, 동료 학자들의 비판에 열어 둘 수 있을 것이다. ‘권위’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권위는 집합적이다. 대학구성원들을 학문적 공동체로 묶어주면서도 안주하지 않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대학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지금 교수집단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허무는 교육정책에 침묵으로서 은밀하게 공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은 지금 모욕당하고 있다. 하지만 ‘적당히만’ 분노하면서 모욕을 감내하고 대충 타협하고 있다. 교수의 지위는 안정적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곧 다음 세대 연구자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다음에 올 세대가 학문적 역량을 배우고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함께 학문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동료연구자들, 하지만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 방기이다.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그들의 노동에 ‘기생하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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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대학이 권력의 눈치를 보고,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이제 스스로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혼자, 몇몇이서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내뱉을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방조하고 은밀히 공조하고 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야 한다. 그런 부끄러움이 있어야 무력한 7평짜리 공간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집단적 분노와 비판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지식이 상품화되고 연구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찍어내는’ 이 모욕적인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 담론과 쟁점>에 게재됐던 '비판정신의 실종과 민주화운동 세대의 이율배반'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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