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64) 허버트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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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김인환 역, 나남, 2009.

1. 사랑이 사라진 시대

사랑에 관한 동서양의 고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이몽룡과 성춘향의 나이는 대략 16세 전후이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셈이다. 시쳇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요즘의 부모들은 아마도 자기 자식이 그런 사랑을 한다고 하면, 도대체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그런 엉뚱한 짓이나 하고 다니느냐고 나무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진정 엉뚱한 짓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재생산을 위한 요건을 갖추게 된다. 이성을 찾아 결합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은 사춘기 청소년의 몸과 마음을 생기가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체로 만들어 생명의 보존과 재생산이라는 의무에 대응하게 한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그 시기에 성행위를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엉뚱하기는커녕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일은 일반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일이 되었으며, 십대들의 성행위는 비행청소년들의 특권이 되었다.

모범적인 청년들은 자신들의 자연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욕망을 실현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유예할 것을 강요당한다. 20대는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 스펙을 준비하는 시기로서 연애는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평균적인 결혼 연령이 30세를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 자연의 욕구를 십여 년 동안 억눌러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의 청년들이 자연의 섭리를 오랫동안 거스르면서 스스로를 좁은 고시원과 도서관 열람실에 가두고 있는 상황은 누가 보아도 건강한 장면은 아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때 병이 나게 되어 있다.

그나마 30대 초반에라도 결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랑을 향한 욕망을 성공적으로 억누르고 스스로를 억압한 결과 점수 따기 경쟁에서 승리하여 운 좋게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에 해당한다. 취업 경쟁에서 실패한 청년들은 여전히 욕구불만의 상태를 지속시키는 가운데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의 최저임금을 벌기 위해 비정규 노동이나 아르바이트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해소되지 않은 욕망을 품은 건강하지 않은 청년들로 넘쳐나게 된다. 청년들이 병 든다는 것은 쇠락하는 문명의 징후이다.

최저임금을 인상해야한다는 요구는 청년들이 즐거운 놀이에 탐닉하거나 쾌락을 향유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병든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이다. 재벌에 편드는 경제학자들은 소위 생산성의 향상이 없는 최저임금의 인상은 대량해고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위해서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장난을 한다. 사랑의 욕망마저 부정당한 청년들에게 생산성 향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자본주의의 경제발전은 수많은 사람의 행복을 유예시킨 결과이다. 이제 도대체 무엇이 진정으로 엉뚱한 짓거리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자연스러운 사랑인가 아니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예적인 복종인가?

2. 해방된 에로스에 대한 상상

일찍이 문명의 역할이 인간의 리비도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은 프로이트였다. 인간은 동물의 길을 벗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승화하는 다양한 방법을 발명해 왔다. 생존본능이라고 할 에로스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로스에 대한 문명의 억압은 문명 속의 불만을 점점 누적시킴으로써 인간의 파괴적인 본능을 동시에 성장시켜 왔다. 현대 과학기술의 대량 살상 무기는 그와 같은 억압의 결과이다. 더욱이 최근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에너지를 경제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몰아감으로써 그 파괴성을 극단적으로 키웠다. 문명의 억압이 지속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문명의 역할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충실히 해설하면서 동시에 프로이트가 비관적으로 보았던 인류의 미래에 탈출구를 마련하고자 시도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으로서 비판이론을 주창한 그는 프로이트에게서 계몽의 변증법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란 이성의 발달을 토대로 진보를 꿈꾸었던 근대가 목적합리적 이성의 발달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 때문에 스스로 지양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목적합리적 이성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본래적인 기능인 비판을 일깨우고, 인간을 발전의 수단으로 삼은 목적합리적 이성이 비판적인 이성에 자리를 내줌으로써 계몽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문명과 에로스 사이에서 일어난다. 문명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할 에로스를 억압함으로써 인류를 번성하게 하고 죽음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문명의 억압이 고도로 능률화된 사회 속에서 제도 전체, 체제 전체 속으로 확산되어 감에 따라 겉으로는 문명이 자신을 위협하는 공격성을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문명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파괴적인 힘을 스스로 축적한다는 것이다. 에로스를 억압함으로써 유지되어 온 문명은 스스로의 논리에 따라 에로스를 해방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가 온전히 해방된 문명을 프로이트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고 비판한다.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 것 같은 기술적인 발명은 고통을 정복하기 위하여 사용되는가, 아니면 고통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해되는가, 아니면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의사와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과학적으로 전멸되는가. 추방된 사람들은 변경을 넘어서 자기의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쫓김을 받고 있는가. 민중은 본래 무식한 것인가, 아니면 날마다 받아들인 정보와 오락에 의해서 무식하게 만들어졌는가.”(127쪽)

기술적 발명과 문명의 발전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줄이지도 못하며, 난민을 없애지도 못한다. 게다가 민중을 똑똑하게 만들기는커녕 점점 더 멍청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이 문명의 귀결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문명의 억압에 맞서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마르쿠제는 그것을 “지배적인 현실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130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문명의 일반적인 규범에 순종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철학, 예술, 문학은 바로 그와 같은 절대적인 거절을 수행한다. 그는 노동을 강요하는 문명에 맞서 에로스의 미학적인 해방이 요구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소외된 노동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의 세계에서 노동을 제거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창조한다”(같은 곳)라고 말한다. 오늘날 문명은 노동을 위해 인간을 말살한다. 그에 맞서 인간을 위해 노동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하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의 해방을 통해 인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스를 문명의 억압으로부터 구출하려면 생산성이라는 낱말부터 버려야 한다. 그는 그 낱말 자체가 억압과 속물적 억압 찬미의 맛을 풍긴다고 말한다. 그것은 착취적 이성에 의한 본능의 순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현실원칙을 부정할 때 우리는 쉴러가 말하는 ‘유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에로스가 해방된 문명에서는 육체와 정신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극복될 것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인 쾌락에만 탐닉하는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마르쿠제는 “지배적인 현실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이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낭만적인 미학적 대안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확실한 교훈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사랑을 하지 못해 병들어 있으며,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그들을 도서관과 고시원에 가두기보다 그들에게 돈을 쥐어줘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로티는 “우리가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먹고 살 자유를 주면, 젊은이들은 스스로 사랑할 것이다.”  / 이유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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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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