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9) 갓장이가 헌 갓 쓰고, 무당이란 사람이 남을 빌려서 굿을 한다.

* 갓쟁이 : ‘갓장이’, 갓을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갓쟁이’는 ‘갓 쓴 사람’을 낮추어(비하해) 일컫는 말. 여기서는 ‘갓장이’
* 놈 : ‘남[他人]’의 제주방언
* 쓰곡 : ‘쓰고’의 제주방언
* 빌엉 : ‘빌려서’의 제주방언. ‘빌다’는 (신·부처에게) 소원이 이뤄지도록 바라면서 청하다(祝願). ‘빌리다’는 (나중에 돌려주기로 하고) 남의 물건을 얻어다 쓰다.(借用)

진즉 새 갓을 써야 할 갓장이는 헌 갓을 쓰고, 굿하는 무당이 제 굿은 못해 남(동료 무당)을 빌려서 한다 함이다. 가까이 있는 것이 도리어 알아내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남의 일은 잘 알 수 있어도 막상 제 일을 당하면 자신을 잘 모른다. 
  
비슷한 말이 있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 일상에서도 노상 겪는 일이다. 끼고 있는 돋보기를 못 찾아 소란을 피운다든지, 왼쪽 주머니에 열쇠다발을 넣어놓고서 오른쪽 주머니를 뒤지면서 찾는 등. ‘중이 제 머리 못 깎고 의사가 제 배 못 가른다’고도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 가까이 있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스님들은 대부분 머리를 제 손으로 깎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양 초발심(初發心)을 일깨우리라. 

이건 허구적 상상이다. 

‘한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남에게 최대한 자신을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좋은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한량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를 욕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됐다. 그러자 그는 ‘어떤 아이’와 친해지고 싶은 나머지 ‘다른 아이’를 같이 욕하게 됐다.

알고 보니, 그 ‘어떤 아이’는 한량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 아닌가. 역시 등잔 밑은 어두운가 보다.

그럴싸한 비유다. 세상엔 의외로 이런 일들이 널려 있다. 
  
지난 5월에 돛을 단 새 정부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자못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못 보던 가슴 뭉클한 장면들을 보여 주면서 감동케 하고 있어서다. 그중, 청와대 앞을 개방한 것은 전에 없던, 상상을 초월한 일이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새 대통령의 과단성과 개혁 개방에의 의지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상징성을 지닌다. 국민들이 얼마나 열광했던가. 열린 마당으로 삼삼오오 무리 짓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대통령이 청와대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라니. 전에 보지 못하던 그림이다. 그 하나만도 충분히 우리를 가슴 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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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관람객에게 창문에서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출처=문재인 대통령 트위터.

대통령이 가슴을 열고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이 한 폭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유별한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소통 부재, 과거가 꽉 막히고 닫혔었기에 오늘의 소통은 도처에 빛으로 스민다. 그래서 세상에 생기가 감돌고 웃음 띤 길 위의 걸음들이 경쾌하다.

한데도 뭔가 마음 졸이게 하는 것들, 이를테면 왜 저리 가야 하는가 하고 뜨악해 보이는 일들이 눈에 띈다. 그런 것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쳐들고 있어 행여나 해 가슴 쓸어내린다. 어디 한둘인가.
  
고위직 인사 절차인 국회 청문회가 마음에 걸린다. 부적격으로 채택되지 않았음에도 임명하는 대통령의 결단에 고통이 따를 것을 알면서도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을  접지 못한다. 5대 인사배제 원칙이 구두선이 되고 있지 않은가.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국민의 뜻은 그게 아니다’ 운운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냉혹해야 할 대목이다. 그렇게 밀어붙이기식이라면 국민을 대변하는 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의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야 3당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지율에 취해….”라고. 협치는 끝났다는 선언까지 하고 있다. 지지율이란 것은 실체가 없는 거품일 경우가 많다. 언중유골인데, 말 속에 들어 있는 ‘뼈’가 쇳조각보다 더 딱딱하게 느껴진다.
  
사드, 증세, 탈 원전, 노조, 적폐청산 등 발등의 불들을 꺼야 한다. 이런 현안을 풀어 감에 대통령과 여당의 독주(獨奏)는 결코 바람직한 무대가 아니다. 촛불을 기억해야 한다. 촛불이 밝히던 그 밤으로 깨어나야 한다. 삼중주의 화음을 낼 때 비로소 무대는 아름답다. 무대는 음악으로 완성된다. 
  
혹여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힘의 논리에 기대는 일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제도란  사람이 주무르는 것이다. 바람에도 꺼지지 않던 촛불이었다. 촛불이 가물거리면 다시 들어 올려야 한다. 지도자의 몫이고 길이다. 

초심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겨우 석 달, 이 정권이 갈 길은 멀다. 순탄하기만 하랴, 험한 역정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벌써 왼쪽 주머니에 넣어놓은 것을 못 찾아 오른쪽 주머니를 더듬는 일이야 차만들 있을까. 남의 일에 바싹했던, 어둠에 닫혔던 몇 달 전을 잠시라도 잊어선 안된다.
  
등하불명, 이 말을 곱씹는 이유는 이 말 속에 녹아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후행하는 것이 아니다.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 발을 내딛던 그때, 시종일관하리라던 그 길, 옳고 곧은 그 길을 골라 디뎌야 한다. 

길이 마땅치 않으면 없던 길을 만들며 가는 것이 지도자의 역량이다. 국민의 선택한 바로 그 역량이었다. 담대하되 용의주도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갓쟁이 헌 갓 쓰곡, 무당 놈 빌엉 굿 헌다.”

그래서는 안된다. 갓쟁이는 갓을 만들어 파는 직업인, 프로다. 제발 헌 갓이랑 쓰지 말고 새 갓을 써야 한다. 헌 갓인 것을 모르고 쓰는 우(愚)를 저질러서도 안된다. 그리고 남을 빌려 굿하지도 말 일이다. 남 빌려 굿할 사람이 따로 있다. 지도자가 ‘제 일’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굿을 하려면 제대로 굿판을 벌일 일이다. 객석에 국민이 있다. 나라가 있고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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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6일 중앙보훈병원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출처=청와대.
  
반듯하게 ‘갓 쓰고, 제 굿 제가 하기’를 간곡히 빌고 싶다. 국민의 소망이다. 국민은 언제나 바르게 선 자(者)의 편이다. 

또 지도자가 막중한 소임을 온전히 다하기를 원한다. 그게 민심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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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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