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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쏠린 문단 현실에도 더 제주다운 시 쓰겠다”

김태연 기자 imty@jejusori.net 2017년 08월 09일 수요일 19:51   0면
[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耽羅巡談)] (5) 제주 시인 7인 

제주비엔날레 2017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탐라순담’은 탐라 천년의 땅인 제주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토크쇼·집담회·좌담회·잡담회·세미나·콜로키움·거리 발언 등 다종다양으로 제주의 현안과 의제에 대해 이야기(談)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누구나 주인공이자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약 50회에 걸쳐 ‘제주 하간듸’(많은 곳)서 ‘제주 사름’(사람)이 ‘제주를 곧는’(말하는) 탐라순담이 열립니다. 제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여러 담론 속에서 제주의 가치, 제주의 현안을 길어 올리고 사회적 예술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탐라순담[耽羅巡談] 다섯 번째 순서는 제주 시인 7명이 ‘제주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8일 오후 7시30분 제주 시옷서점에는 나기철, 김세홍, 안은주, 오광석, 허유미, 김신숙, 현택훈 등 제주에서 나고 자랐거나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이 둘러앉았다. 등단한 지 갓 1년을 넘긴 새내기 시인부터 30년이 넘은 원로 시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마치 입시 제도처럼 등단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중앙 편향적인 문단의 현실에 대해 토로하면서도, 그럴수록 더욱 제주다운 시를 쓰겠다는 다짐을 굳힌다. 누가 시를 가르쳐주거나, 시인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어도 시인이 되기를 자처한 이들이다. 

7명의 시인이 작품에 드러나는 제주다움은 그 색채가 다를지언정, 제주가 가진 모순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시의 언어로 옮겨낸다.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면에 해녀들의 고된 삶을 그리기도 하고, 관광지로 각광받는 제주 곳곳에서의 4.3의 흔적에 주목하기도 한다.

시만 써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기에 시인이 ‘직업’은 아니라고 하는 현실에도 이들은 시를 쓰고, 시를 유통하고, 시를 고집한다. 이날 탐라순담이 열린 시옷서점은 현택훈, 김신숙 시인 부부가 지난 4월에 문을 연 시집 전문 서점이다. 동료인 오광석 시인이 건물주로,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내줬다. 그저 다음 세대의 시인을 꿈꾸는 청년들이, 조금 더 나은 여건에서 시를 쓰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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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비엔날레 탐라순담 다섯 번째 순서에는 시집 전문 서점인 시옷서점에서 제주 시인 7인이 모였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만나게 되어 반갑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김신숙 시인
: 현택훈 시인과 시옷서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등단한 지는 좀 되었고, 올해 9~10월 첫 시집이 나온다.  

김세홍 시인
: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시를 쓰고 있다. 하루500자 시 쓰기 밴드를 3년반 정도 해오고 있다. 제주의 전통과 역사, 사람 관계 이런 글들을 특정 장르를 불문하고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 중심에 시가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현택훈 시인
: 시옷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구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안은주 시인
: 제주작가회의에 소속돼 있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됐다.

허유미 시인
: 제주작가회의 소속이다. 이 중에서 등단을 가장 늦게 해서 새내기라고 할 수 있다. 

오광석 시인
: 등단한 지 얼마 안 됐다.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시 쓰는 조무래기다.

나기철 시인
: 여기서 나이가 가장 많다. 데뷔한지 30여 년 동안 시집 5권을 냈다. 신성여고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명예퇴임하고, 현재 명도암에서 살고 있다. 

현택훈 시인
: 오늘 주제가 ‘제주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인데 시인을 직업으로 가지고 산다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손에 꼽는 경우이다. 생계유지를 하면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시인으로 산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본인의 제주에 관한 자신의 시에 대해서 낭독을 하면서 문을 열었으면 싶었다. 각자 제주에 대해 쓴 자신의 시 1편씩 소개해 주면 좋겠다.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을 듣고 싶다. 나는 <카라 만다린> 시를 소개하겠다.

 카라만다린*

현택훈

 농업용수를 벌컥벌컥 마시던 여름이었다 잎사귀 밑에서 꾼 꿈이 여름이었다 빙하기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여름이었다 산남으로 숨어들고 싶었지 노랗게 익어버린 게 무얼 더 바라겠냐며 톡톡 나뭇가지 잘리는 소리에 군침 흘리는 감귤창고는 여름이었다 중산간마을의 밤은 별을 바라보기 좋다고 말해주던 네 얼굴은 말이 아니었지 나비처럼 앉아있던 하얀 꽃잎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던 봄날 지나고 우리 이제 같은 신세라며 서로 의지하던 여름이었지 내 얼굴에 맺힌 빗방울을 혀로 핥으며 하루가 저물어도 좋았네 청치마를 입은 여름 하늘엔 하얀 다리 같은 구름이 살짝살짝 보였네 어쩔 수 없이 익어가야 했지만 내가 푸른 열매였을 때 버스비가 없으면 걸어도 좋았지 가지치기 당한 듯한 팔목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너의 방 너의 집 대문은 여름 내내 푸르렀지 너의 교복은 봄 동안 푸르렀지 묘목의 마음으로 무구하게 살아온 지난 날은 모두 여름이었다 가끔 비바람 몰아치는 날도 있었지만 삼나무는 여름 쪽으로 기울곤 해서
 
 화살깍지벌레 없는 여름은 
 한낮에도 깊은 밤처럼 무서웠다


 * 미장온주와 킹만다린을 교잡한 감귤 품종으로 초여름에 수확한다.
안은주 시인
: <다시 봄>이라는 시는 4.3에 관한 시다. 매년 TV를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어머님들이 울면서 보는 걸 느낀 감정을 썼다.

다시, 봄

안은주

지구의 모든 꽃잎과 같은 숫자로 뜨겁게 끓어
어금니 사이를 빠져 나가는 붉은 피

온몸으로 없는 눈은 듣고 
없는 귀는 보고

뜨겁게 끓던 햇살에
무슨 잎이 진지도 모르고

비릿한 꽃이 조각, 조각 피었다 질 때
아랫동네에서 한라산까지 밀린

기억되는 순서로 다시 순환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닌 
또 한 번의 봄이 온다

와랑와랑 붉게 타오르며
그래 다시, 봄

허유미 시인
: 나는 제주에 관한 시가 거의 없다. 4.3에 관한 시도 몇 편 썼지만 제주에 관한 시가 별로 없다. 내 고향을 먼저 써야겠다는 생각에 <산방산 송악산>을 쓰게 됐다.

산방산 송악산


                                                  허유미

산방산은 송악산을 ㄱ이라 부르고
송악산은 산방산을 ㅇ이라 부르고
바람은 이 둘을
ㅏ와 ㅗ로 부르고
말들은 초록의 시간 밖으로 나온 적이 없고
여명으로 피는 인동초에 할머니 주름은 달콤하고
불경처럼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어머니는 봄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모래는 소라껍데기로 무지개 주문을 외우며
나를 불러내고  동무들을 불러내고
사랑이란 단어를 들으며 자라진 못해도
섬의 입김을 받으며 자라고
ㄱ을 듣고 ㅇ을 듣고
ㅏ을 소리내 고 ㅗ를 소리 내고
말[言]의 고향으로 오면
화장은 자꾸 지워지고 어느새
뚜껑 열린 장항처럼 땡볕을 좋아하고
섬이 사람을 안고 저물어 가면
뭍은 섬쪽으로 뻗어오고

 오광석 시인

: <사려니숲길>은 최근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제주에 관한 시를 가져오라고 해서 지명에 관한 시를 가져왔다. 4.3에 대한 내용이다. 사려니숲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생소한, 제가 어릴 때 이덕구 산전을 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을 갔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작품에 담았다.

사려니숲길

오광석

칼날들이 떨어진다
불타는 칼날들이 대지를 태운다
타오르는 대지를 가로질러
숲으로 가는 길
붉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가오는 겨울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
시린 눈이 내리고 나면 대지가 식을까
봄을 기다리던 시절
대지의 피를 받아먹은 나무들이
마지막 칼날들을 쏟아내면
나무들 중간 중간에 박히는
사람들의 벌게진 눈
살려는 사람들이 숨은 숲
다 타버린 세월만
반쯤 쓰러져 말라가는 고목에 
총탄자국 같은 주름으로 남아있다
옛 기억을 잊어가는 길을
사람들이 다시 걷는다
떨어진 칼날들 위로 웃음소리가 
토벌군 마냥 덮친다
그 사이에 쉬쉬하고 
숨은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소곤소곤 귀엣소리가 
나무 사이로 들린다
나기철 시인
: <애월 곶자왈>은 산문체로 쓴 작품이다. 예전에 우연히 곶자왈인 줄도 모르고 일행과 숲으로 갔다가 애월 곶자왈 지역을 걷게 됐다. 짓다가 중단된 건물을 보게 됐는데, 중세의 성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괴된 모습에 마음이 참 그랬다. 

애월 곶자왈
나기철

 유수암 지나 다리 부근 노꼬메오름 아래 승마장 써진 큰문 들어가면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때죽나무 엉켜진 숲 한참 가면 중세의 성곽 같은 건물 그 앞 넓은터 사람은 없고 오래 전 짓다 부도로 멈춘 천년 사람의 자취 없는 돌성 말 들어가지 않게 쌓아 놓은

김신숙 시인
: 시옷서점의 모토가 ‘소설은 읽고, 시는 입는다’이다. 시는 선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잘 쓴다는 말에 동의를 한다. 선천적이라는 것은 20살 전의 경험이다. 그 경험을 가지고 시인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달려있다. 이 시는 문예지에 처음 발표한, 못 쓴 시지만 오늘 소개를 하고 싶다. 
저의 선천적 시적 재능은 중-고등학교 시절, 가난한 친구들의 아픔을 보면서였다. 그게 나의 시적 동기였고, 시 때문에 견뎠다. 그들로 인해 상상력과 사회를 만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제주도가 관광지의 이면에 성적으로 유린되는 현장도 많았다. 우리나라의 항구도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는 제주가 읽어내야 할 것들, 읽어내야 할 슬픔이 많은 도시가 많다고 봐서, 풍경보다는 눅눅한 곰팡이 같은 시만 써왔다. 그게 <열다섯 살의 차도르>이다.
열다섯 살의 차도르

김신숙

우리는 반짝거리는 것이 떨어진 기름이라는 걸 알았다 큐빅 같이 빛나는 기름방울을 이쁘다 함께 일렁이며 하달달하달달 자랐다 작은 부둣가는 밤마다 더 검은빛으로 반짝거렸다 그 빛나는 기름 위 둥둥 떠 있는 걸 우리는 가래침으로만 알았지, 한 번도 밤의 정액이라고는 생각 못 한 열다섯 살에 너는 가장 먼저 우리 마을에서 가출한 아이, 따라간 몇 명은 교실로 돌아왔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어도 너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너는 둥둥 떠다니다 깊은 밤 여의 창을 두드리기도 했다 여의 집은 정류장과 가까웠다 깊이 잠든 너를 구경하다 등교를 할 때면 마음이 차가워 장롱 안에 너를 개켜두고 싶었다 돌아와 보면 이불을 가지런히 개켜 놓고 너는 없다
누군가 만들어준 가짜 주민등록증으로 너는 술집으로 일을 나가고 여관방도 얻었다 이모를 만나러 왔어요 여는 교복을 입고 여러 여관방을 구경할 수 있었지, 가끔 열다섯 살 여가 찾아간 이모처럼 너는 곱게 화장을 하고 마을로 돌아와 우리에게 술과 담배를 사주었다 어떤 날은 고등학생 오빠들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런 날 바라본 바다는 밤별을 모두 삼킨 것 같아 기분이 좋아 힘이 세 보였지만 아프게 뒹쿨거리고있었다
너는 깊은 곳으로 한없이 내려갔다 고개를 한층 더 깊이 숙이며 작정하듯 더 깊은 바다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여는 단단한 여관방 계단을 오르다 가끔 멈췄다 고개를 한층 더 깊이 숙이고 다시 계단을 오르며 너의 웃음이 왜 반짝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술이 깨지 않아 축 늘어져 큐빅 같이 조그맣게 웃는 너, 침대 위에는 누가 뱉은 가래침인지 모를 끈적한 어둠이 비린 바람으로 불었다
우리에게 진짜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너는 몸이 자주 아프고 저물어 갔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일을 찾아 서해로 갈 거야 서해의 정류장 이름을 물어보는 여에게 너는 말했다 시비가 붙은 밤은 싸움을 말려 주는 사내 옆에 웅크려 있으면 돼 그러나 정작 아무도 없는 그런 날은 유리병을 깨 팔을 긋지 피가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두려워해 도와주는 사람 없어도 싸움은 끝나는 거야 스스로 팔을 긋는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치는 부둣가 밤
검은 물결을 따라 반짝이들은 차르르르 쓸리고 한 손으로 끌어 올린 드레스 자락 같은 벼랑, 어디선가 따르고 있을 검은 커피가 찻잔에 부딪치는 소리 같기만 하다 너는 찾아오지 않고 여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낯선 종교의 기도문을 암송하며 잠이 들었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수치심으로 검은 바다를 칭칭 감았다 
여의 밤은 낯선 종교처럼 신비로운 슬픔을 가르쳐 주었다 얼굴만 조금 보일 뿐 차도르를 쓴 너는 해가 저무는 바다 끝에서 우리 마을의 여까지 밀려왔다 검은 차도르 속으로 별은 들어와 박히고 너와 여는 별을 품고도 별 때문에 따끔거리고 아픈 시간들, 너는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가장 멀리 간 아이, 서해로 가서 하루 종일 저물어 버린 여자, 깊은 밤마다 검은 차도르 쓰고 여의 창으로 애를 쓰며 다가오는  

나의 첫 일몰 
김세홍 시인
: 저는 현장에서 쓴 시가 많다. 재선충 방제 감독을 하면서 현장에 가면 굉장히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 현장에서 진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방선문 계곡 한가운데 무덤이 있다. 재선충 감독을 다니며 여러 번 갔다. 무덤 봉분이 두 개가 있는데 석등도 있고 전에는 동자석도 있던 걸 봐서 당시에는 지체가 있던 집안의 무덤인 것 같다. 거기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란다. 제주시에서 나온 지적도를 찾아보니, 번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무덤의 주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이후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버려지게 됐다. 그런 걸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방선문에 기대어>는 그 때 쓴 시이다.
방선문에 기대어

김세홍

불꽃이 지나간 너럭바위 둠벙에
하늘이 내려 앉았고
연모하는 마음에 실려 온
꽃잎을 바람이 희롱하네

햇살이 종일 놀다가는 선계를 자궁삼아
이백여 년 터를 잡은 방선문 섬
오라이동 41번지
석등 버려진 고씨 할망 묘터에도 
돋아나는 푸른 것들이
어진 말씀을 들이네

발 길 뜸한 꽃비내리는 
어떤 하루는
이생 이후의 일도 보일 듯
보는 것 마다
내 눈은 터져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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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나기철 시인, 오광석 시인, 허유미 시인.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시와 제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시인으로 제주에 살면서 느꼈던 바를 알려달라.

나기철 시인
: 나는 제주 태생이 아니다. 몰락한 집에 아들로 제주도까지 따라온 것이다. 저의 부모는 이북 출신이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자라다 1964년에 제주도에 왔다. 제주도 사람들이 다 갖고 있다는 지연, 혈연, 학연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선지 경계인 같은 느낌이 항상 있었다. 내가 4.3에 대해서 쓰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여태까지 1편밖에 안 썼다. 육화되지 않아서 쓰지를 못했다. 
제주도에 대한 애정이 잘 가질 않았다. 육지를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초기의 시에는 그런 게 많이 나타났다. 대학 때까지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직장을 얻고 결혼까지 하니 교사로 살면서 긴장성 두통을 앓곤 했다. 그러다 50대에 헤어 나오면서 세 번째 시집부터는 밝아졌다. 제주도에 살고 있으니 제주도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다. 탈출하고 싶은 생각, 살면서 힘든 것들이 결합돼 있다. 40년 쯤 살다 보니 제주도민화가 되었다. 

김세홍 시인
: 제주적인 것이나 지명이 시에 굳이 나오지 않아도 제주 안에 살면서 사람과 관계 맺고 이런 것들이 그 자체가 나름대로 제주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워낙 매체가 발달하다 보니 중앙과 변방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원고 청탁이나 출판에는 변별이 있을지는 몰라도 예전과는 다르게 시문학에서는 특별하게 그런 것들이 변별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나기철 시인
: 제주 것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조선 중기부터 출륙 금지를 200년 간 하면서 보존이 된 측면이 있다. 1980년대에도 육지 나가기가 힘들었다. 교사를 하면서 교사라는 의식보다도 예술가라는 의식으로 살았다. 1978년에 부임해서 국어교과서를 보니 절반이 새마을운동이나 자연보호활동에 대한 것이었다. 시도 입시 위주의 시가 실려 있고, 예술가로서 억압기제가 있었다. 

김신숙 시인
: 학창 시절에는 제주도를 유흥이나 소비적이고 문제가 많은 섬이라고 봤었다. 다시 서른넷이 돼서 시를 쓰려고 하니 그런 제주적인 게 영향을 많이 줬다. 어머니는 우도 출신으로 서귀포 정방폭포의 해녀였다. 마루에서 웅크려서 낮잠을 자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고막 같았다. 내가 어머니의 모습을 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빠서 시를 놓고 있다가도 시를 쓰고 싶은 문장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머리에 붙여놓고 살게 됐다. 등단하지 않더라도 시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일상에서도 시를 붙이고, 머릿속에 담고 산다.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올랐다고 하지만 시인들이 보는 존재적인 모습은 다르다. 허유미 시인의 어머니도 모슬포 해녀이다. 어머니가 바다에서 멀미를 하면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그 눈을 상상하면서 얘기해준 적이 있는데 그 문장을 언젠간 써야지, 붙인 채 다닌다. 제주에서만 느껴지는 존재적인 흐름이 있다. 나쁜 곰팡내가 나는 시를 쓰더라도 에너지가 느껴진다.
 
오광석 시인
: 그게 모순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우리 큰고모도 해녀였다. 유네스코 등재하면서 요즘은 해녀의 이미지가 굉장히 밝게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큰고모는 잠수병을 크게 앓다가 힘들게 돌아가셨다. 거의 반치매 상태로 귀도 뚫리고 무릎에 연골도 나가고 그 힘든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셨다. 해녀의 일을 하게 된 것도 4.3때문이었다. 그 때 부모를 잃고 나의 아버지와 동생을 키우려고 하니 생계를 위해 20살부터 배웠다. 최근에는 오래된 해녀라고 알려져서 기자도 오고 인터뷰도 했지만, 실상 몇 십 년 간 고통스럽게 사셨다. 
그런 것 말고도 모순은 많다. 관광지라고 사람들이 오지만 뒤집어보면 4.3때에 총살당해서 죽은 곳이나 사태가 있었던 곳들이다. 강정마을도 그렇다. 그런 모순이 보이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자꾸 느껴진다.

현택훈 시인
: 저는 고향이 제주시 화북동이다. 과수원집에서 태어났다. 감귤 밭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면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게 원색적인 감각을 준 거 같다. 어릴 적에 종려나무와 야자수를 보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나무나 소나무랑 달리 ‘저게 이 자리가 맞나?’ 제주에 대한 첫 의문이었다. TV에서나 사람들이 ‘제주도는 참 이국적이야’라고 했을 때 그 이국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면서도 좋았다. 어린 마음에는 ‘내가 특별한 곳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기철 시인이 ‘경계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관광지인 섬이자 감귤농사를 짓는 집 사이의 경계인 같은 느낌이 계속 들어서 시를 쓸 때 큰 알 수 없는, 외로움이나 그런 것들이 감각에 영향을 줬다.

나기철 시인
: 나는 자의에 의해 제주도에 온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어머니가 내가 쓴 것처럼 제주신문에 편지를 보냈다. 장학생으로 오현중학교에 합격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다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찾아와 사회면에 크게 실렸다. 졸업식 때 원명사의 스님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에 거기에 고은 시인이 머물렀다. 시인이 전국적으로 2~300명 있을 때였다. 스님인 채로 1958년에 등단을 했다. 그러면서 쓴 시가 있다. 1966년에 낸 두 번째 시집 <해변의 운문집>이다. 그런 인연도 있기도 하고, 원명사에 머물면서 도서관에서 김소월의 초혼, 진달래꽃 시를 읽으면 그게 막 마음을 휘저어놓았다. 그러면서 시를 쓰게 됐다. 

허유미 시인
: 30대 중반부터 시를 썼다. 내 작품에 ‘소’가 자꾸 등장한다. 어릴 때 모슬포에서도 굉장히 시골에 살았다. 또래들이 접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접했다. 당시에 어머니는 말을 타고 물질을 하러 갔다. 할머니가 끌어주는 수레(구루마)를 타고 밭에 갔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 때 수레(구루마)를 탔던 경험으로 “구름을 탄다”는 시를 썼는데 선생님이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초반엔 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나는 제주도를 한 번도 떠나본 적도 없고 쭉 눌러 살았다. 한곳에 오래 살다 보면 우리집이 하나도 예쁠 게 없어 보이다가도 우리집만 예뻐 보이는 날이 있지 않나? 제주가 저에겐 그런 곳이다.

안은주 시인
: 저는 제주가 고향이 아니다. 들어와서 산 지 22년 됐다. 처음에는 생활 방식도 다르고 말씨도 달라서 힘들게 생활했다. 나이가 50세가 다 되어가니, 2~3년 전부터 융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는 2002년도부터 눈을 뜨게 됐다. 방통대를 졸업하면서 같이 졸업한 동기들과 시작을 했다. 멋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정말 어려웠다. 이제 조금 보이는 거 같다. 

김신숙 시인
이 자리에는 첫 시집이 아직 나오지 않은, 최근 1~3년 사이에 등단한 시인 4명을 불렀다. 시라는 게 입시 제도처럼 등급이 있다. 제주도에서 외롭게 시를 써서 개인의 힘으로 등단한 사람들이 있다. 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제주에서 외롭게 시를 썼던, 새내기 시인들이다. 

현택훈 시인
: 중견 시인들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시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직업으로서 시인의 생활을 묻고 싶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인 시인들을 오시게 했다. 그리고 원로 시인인 나기철 선생님과 맏형격인 김세홍 시인을 모시게 되었다. 

김태연 기자
: 창작 활동을 하면서 제주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궁금하다. 또 인상 깊었던 다른 작품도 소개해주면 좋겠다.

현택훈 시인
: 제주가 고향임에도 36세 넘어서 4.3에 대해서 알았다. 큰고모와 고모부가 화북지서 경찰이었는데, 시를 쓰려고 아버지께 가족사가 있냐고 묻다가 알게 됐다. 유년시절 놀던 곤을동이 그런 곳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김세홍 시인의 <폐동>이라는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추천하고 싶다. 4.3에 관한 시인데 서정성이 있다. 4.3을 어떻게 낭만적으로 쓸 수 있느냐, 그런 비판도 있다. 낭만만 추구한 시는 아닌데 그 이면에 슬픈 역사를 전하면서 아름답게 운율이 형성돼 있다. 이렇게 쓸 수도 있다는 힌트를 얻었다. 

오광석 시인
: 검색을 했는데 안 뜬다.  

김신숙 시인
: 제주 시인의 비극이다. 우리의 시는 검색이 안 된다. 

김태연 기자
: 시인으로 제주에 산다는 것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김신숙 시인
: 라음동인인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대학생들이 시를 많이 쓴다. 이 젊은 시인들이 여기(시옷서점)에서 합평회를 하는데, 20대 시를 읽으면 너무 좋다. 이들은 우리처럼 실수하지 않고 더 빨리 적극적으로 시인의 삶에 발을 담가서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시옷서점 공간 만들어놓고 가장 기쁜 일은 대학생들이 시를 읽고 합평회하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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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김세홍-현택훈-안은주 시인. ⓒ제주의소리

현택훈 시인
: 故 정군칠 시인으로서 삶을 살다가 10년 간 회사 생활을 하고 나중에는 시인으로 살면서 도서관 강의만 하고 살았다. 왜 산문은 쓰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선생님이 “시밖에 쓸 시간이 없다”고 하셨다. 그게 뇌리에 남는다.

독립서점이 제주에 많이 생겼는데 대부분 이주해온 예술가들이다. 저희는 어쩌면 거의 제주사람이 만든 드문 독립서점이다. 시인 부부에 건물주도 시인이다. 시집 전문 서점으로 시를 유통할 수 있다면 좋고, 어떤 단 한명의 청년이라도 시를 쓴다면, ‘시옷서점이 있었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김태연 기자
: 앞으로 제주를 제재로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

김세홍 시인
: 사실 육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생활 3년한 것이 전부다. 제주에서 일상을 살면서 섬에 산다고 해서 갇혀있다는 생각은 별반 하지 않았다. 나는 제주 입도 15대이고 종손 집안인데, 앞선 이들의 삶의 궤적을 한번 그려보고 싶다. 선대의 조상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런 궁금증이 있다. 그게 작품에서 구현됐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주 땅의 원형적 삶을 구현하는 게 제 시에서 조금씩 드러나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현택훈 시인
: 저는 어릴 때부터 제주도를 떠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제주도에서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이 좋았다. 지하철을 탔을 때의 그 익명성이 좋았다. 제주도는 시청, 중앙로에 서 있으면 한 시간만 서 있어도 동창 여럿을 만날 수 있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일동 웃음)

서울을 동경해왔고,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대전에 갔는데 정착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심지어 대전충남작가회의도 가입했었다. 첫 시집 <지구레코드>는 대전에서 습작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많다. 제주에 와서 정군칠 시인을 만나고, 제주에 대한 시를 쓰려고 한 게 <남방큰돌고래>다. 남방큰돌고래는 제주도를 한 바퀴 빙빙 도는 습성이 있다. 외가가 협재인데, 그 바닷가에서 돌고래를 보던 게 인상적이었다. 버스를 타고 남방큰돌고래처럼 제주도를 빙빙 돌다 보며녀 제주 마을마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마을도 많았다. 그 때 여기서 시를 써야겠다, 싶었다. 

나기철 시인
: 10대 초반부터 제주도에서만 살았다. 서울에 대한 중압감, 문화적인 것들이 컸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고 서울은 문단도 그렇고 중심적이다. 나는 여기에서 동인 활동도 많이 하고 동인지도 내면 중앙으로 계속 부치기도 했다. 돌아오는 것이 별로 없었고 허망했다. 제주도를 더 떨어져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작년엔 석 달 동안 연희문학창작촌에 머물렀다. 제주도를 떠나서 살고 싶었다. 시인은 엉덩이가 무거울 필요가 없다. 책상에 있다고 시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서울을 막 돌아다녔다. 지하철에서, 남산도서관에서 쓰면서 제주도를 바라봤다. 서울에선 제주도가 참 조그맣다. 

김신숙 시인
: 등단을 하고나서도 등단지에 따라 계급으로 나눠지는 걸 보면서 실망했다. 그래서 정 반대편으로만 가보자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의심을 품고 바라보니, 풀리는 문제가 많았다. 요즘은 시를 훑어보지 않는데, 이 지역에서 공간에서 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현택훈 시인과 연애하던 시절에 “우리는 우표를 편애해야 한다. 우표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니까”라고 말했다. 그런 비슷한 감수성이 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시를 쓰지? 시는 죽은 것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 유화로 자화상을 그리다 카메라가 나와서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회화는 오히려 자유로움을 얻었다. 제 기능이 사라졌을 때 어디로 갈지 바라보는 그 관찰에서 시가 시작된다. 그게 생활패턴으로 이어지면 절망적이고 다 끝나고 상처투성이의 사람이더라도 새로운 것이 탈출하는 지점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못하는 예술이라면 문제가 있다. 요즘은 마케팅처럼 콘텐츠화하는 작업에 우려가 있다고 보는데 진지한 성찰이 있는 작업들에 발맞춰서 끼우는 작업을 해야겠다. 나에게 시는 젊은 기운에 하는 도전인 거 같다. 

오광석 시인
: 현실적인 문제가 분명하다. 제가 봤을 땐 시인은 직업도 아니다. 일상적인 일이자 활동이다. 시를 쓸 시간이 없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면 시간이 별로 없다. 스마트폰에라도 막 적어놓게 된다. 그렇게 시간 날 때마다 써야 한다. 

김세홍 시인
: 시적인 생활을 통해서 시가 생산이 되는데, 일상과 시적인 생활이 유리가 되면 시가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시인은 (돈을 벌지 못해) 직업은 아니라고 하지만 일상을 예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가난을 숭상하는 건 아니지만 애매한 접점에서 당대의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직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허유미 시인
: 중앙에서 활동하는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어디로 등단했냐고 물었다. 그 때 섬의 언어로는 등단을 못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섬스러운 언어로, 더 섬스러운 문화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차가 없어서 별로 돌아다니질 못한다. 애향운동장에 자주 간다. 가보면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다. 그 분들의 말을 듣고, 최근엔 어르신을 소재로 한 시도 많이 쓰고 있다. 앞으로도 그런 쪽의 작업들을 할 것 같다. 

안은주 시인
: 저도 생업 때문에 아홉시-여섯시 퇴근을 매일 한다. 원고 청탁도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이 조급해서 시를 써내지도 못하면서도 항상 불안하다. 뭐 하나를 써야할 것 같은데. 그런 감정이 시인이 된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퇴근하고 옥상에 가서 멀리 한라산을 보는데,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떻게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감정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서 빚쟁이처럼 시가 독촉하는 거 같아도 아직은 좋다. 

김신숙 시인
: 시집서점을 열어 보니 시인들이 시집을 팔아서 돈을 벌지 못하고,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시인들이 시도 쓰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유통을 꿈꿨으면 한다. 다른 식으로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고 있고, 중앙문단에서 밀려난 시인들이라 스스로 웹진도 하고 있다. 유명한 출판사에서 시선집을 내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꿈이 있다. 스스로 출판사를 차려서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찾아다녀서 그 말을 옮겨서 시선집을 내는 게 꿈이다. 그런 시도가 메이저의 무게가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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