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耽羅巡談)] (7) 김웅철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
 

제주비엔날레 2017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탐라순담’은 탐라 천년의 땅인 제주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토크쇼·집담회·좌담회·잡담회·세미나·콜로키움·거리 발언 등 다종다양으로 제주의 현안과 의제에 대해 이야기(談)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누구나 주인공이자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약 50회에 걸쳐 ‘제주 하간듸’(많은 곳)서 ‘제주 사름’(사람)이 ‘제주를 곧는’(말하는) 탐라순담이 열립니다. 제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여러 담론 속에서 제주의 가치, 제주의 현안을 길어 올리고 사회적 예술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탐라순담[耽羅巡談]의 일곱 번째 순서는 서귀포 대정에 자리를 펼쳤다.

지난 17일 오후2시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대서로 17(옛 보건소자리)에서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김웅철 이사장이 ‘제주 근현대 역사문화의 근간, 대정의 오늘’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놨다.

영어 교사였던 김 이사장은 사비를 털어 1980년대부터 미국에 드나들며 제주의 사료들을 모아왔다. 그가 향토사학에 눈을 뜬 건 선대와 추사와의 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사와 친분이 있었던 선조의 유품을 어린 시절 멋모르고 딱지를 만들었단다. 교사로 재직하며 대정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선시대 제주의 삼읍 중 한 곳이었던 대정은 역사문화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먹고 입고 쓸 것이 풍부했던 대정은 예부터 제주 최고의 산업지로 꼽혔다. 농사는 물론이고 어업과 양잠 등이 번성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는 우여곡절이 따르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 온 인사들의 절반이 대정현에 머무르며 많은 영향을 남겼다. 이들은 제주의 유생들을 모아 강학이나 강습을 하기도 했는데, 모관(제주성 안)에서도 대정현으로 유학을 올 정도였다. 추사는 대정향교에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이름을 짓고 편액을 쓰기도 했다.  

모든 것이 풍부했던 대정은 필연적으로 가렴주구가 잦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요새로 쓰이며 착취와 수탈을 당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제1훈련소가 생겨 50만 군인을 양성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4.3사건의 광풍도 피해가지 못했다. 

김 이사장은 대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추사에 대한 연구도 다른 각도로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기예나 학문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170818.png
▲ 김웅철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이 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 일곱 번째 연사로 나섰다. ⓒ제주의소리

김웅철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
: 대정은 크게 잡으면 대정현이 된다. 대정현은 동(東)으로 치면 서귀포시 법환동, 서(西)로는 제주시 한경면 일대가 된다. 고병호 선생이 쓰신 원대정군지에 보면 고색창연한 대정성지가 실려 있다. 대정성의 중심이 되는 대정고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병호 선생께서 무려 8년 정도 시간 있을 때마다 돌아다니면서 파헤쳐서 쓴 책이 원대정군지다. 왜 대정이라는 말이 나왔나? 모슬봉 동북쪽에 아주 야트막한 구릉지대가 있다. 거기를 흔히 한괴라고 불렀다. 바람 많다고 소문난 대정 모슬포에서도, 유독 거기는 아늑하고 바람이 덜 불던 곳이었다. 조그맣게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그 일대를 한괴, 한괴동, 한괴마을, 한괴현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대정의 원래 명칭이다, 한괴를 중심으로 대정현의 형성 과정에서 재밌는 사실이 있다. 대정의 한자음은 큰 대(大), 고요할 정(靜)이다. 왜 모슬포라는 이름이 생겼나? 이 대정현 앞바다가 거의 대부분 모래톱으로 이뤄진 곳이다. 모래는 제주어로 모살이라고 한다. 모살개가 나중에 모살포가 되었다. 마치 탄금하는 여인상이라고 해서 거문고 슬(瑟)자를 썼던 것이 그래서 모슬포가 되었다. 

대정현은 멀리 동쪽으로 천제연을 지나서 홍로현(지금의 서홍동)이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는데 홍로현 일부와 서쪽으로는 한경면을 아우르는 것이 차귀현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16년에 방호에 필요한 행정구혁이 개편되어야겠다고 해서 두 개로 잘라서 나눈 게 동쪽은 정의현이고, 서쪽은 대정현이 됐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대정현이 이어져오다가 이형상 목사가 화공을 데리고 제주목을 두루 돌아다니며 탐라순력도를 남겼다. 대정의 시작은 현폭사호라고 해서 천제연이라고 표현된 것이 대정의 경승지 중 하나였다. 

산방현이 대정현의 으뜸현이었다. 탐라순력도에는 대정배전이 나온다. 당시에는 활이 가장 잘 쏘는 사람이 싸움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배전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모아놔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한다. 대정강사를 보면 경로잔치를 벌였던 게 있다. 단산을 파군봉이라고 했다. 바굼지오름이 파군봉이 된 거다. 대정현성의 동쪽은 동성, 서쪽은 서성이라고 불렀다. 유명한 정난주 마리아가 유배 왔던 그 일대가 서성리다. 구억리는 동성리의 일부이다. 가장 외진마을이라고 해서 구석밭이 됐다. 그게 한자음으로 표기하다 보니 구억리가 된 것이다. 마을이름이 한자어로 바뀌면서 다른 마을도 그렇겠지만, 고생을 많이 한 동네가 대정현이다. 이지역 뿐만 아니라 제주도 일원의 지명, 고유명사가 많이 와전되고 있다.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모슬포 서남쪽에 지름이 약 50m되는 성이 있다. 수군진성인데, 그게 바로 모슬진성이다. 모슬포 항구를 만드는 것이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것이다. 모슬포 항구에서 연락선이 많이 기착하던 곳이다. 특히 최근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해녀들이 활동하는데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징발돼서 나갔다. 해조류 채취의 본격적인 현장이 가파도이다. 

모슬진성 주변의 연락망이 서너 군데가 있다. 봉수대, 봉화대, 연대 이런 것들이다. 모슬포 매립지에서 귀퉁이 꺾어 들어간 곳에 연듸왓이라고 하는 연대가 있던 밭이 있다. 송악산에는 별도연대가 있었다. 산방산 앞에 연대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게 예래동까지 연결이 돼 있다. 그 사이에 망이 있다. 수군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170818-02.png
▲ 김웅철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이 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 일곱 번째 연사로 나섰다. ⓒ제주의소리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성에서 주관하는 폭격기지가 있었다. 큐슈에서 난징에 가려면 너무 거리가 멀어서 안 되니, 모슬포에 와서 재급유도 하고 재무장하면서 마라도 등대에서 작전을 지시했다. 

대정현의 역사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이, 대정현은 제주 전체의 산업벨트였다. 대정현에서 안 나오는 게 없었다. 토기도 나오고, 철도 나오고, 곡식 농사도 잘 되었고, 해산물도 풍부했다. 밀감도 나고 목축업도 왕성했다. 양잠, 면화 재배도 다 잘 됐다. 정의현이나 모관에서 큰애기(큰딸) 시집을 보내려면 이부자리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대정목화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대정에서는 소금도 나왔다. 종달리 소금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품질이 아주 우수했다. 천일염치고 농도가 짙다. 제주 사람들이 종달리 소금은 비삭지다고 한다. 굳지를 못하다는 뜻이다. 

대정에서 나온 모든 게 제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리적으로 보면 대정읍 지역은 제주의 13개 읍면 중에 가장 작은 곳이지만 쓸모 있는 땅은 가장 많았다. 대정이야말로 제주도에서 가장 큰 벌판, 알뜨르를 지닌 곳이다. 제주도에서 큰 드르는 세 곳이다. 알뜨르, 정뜨르(공항 일대), 진드르(조천읍 신촌)다. 알뜨르에는 해군 비행장, 진드르와 정뜨르에는 육군 비행장, 교래리 강습 특공부대 육군비행장이 하나 있었다. 나머지 세 비행장은 규모가 작았지만 원대한 꿈을 가지고 대동아 공영권을 확립하고 아시아의 패권을 쥐려던 전력투구를 했던 곳 가장 대중국 교두보가 바로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활주로가 짧아도 되는 이점도 있고, 강습을 하거나 훈련을 하거나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알뜨르였다. 

대정현의 두 번째 특징은 대정현은 고려조 이후 유배문화의 백미였다. 유배 인사들이 가장 많았다. 52%가 대정현에 머물렀다. 유배 인사들 중 제주사람들을 많이 교화시키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서 가장 빠르게 조정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알게 해준 곳이 바로 대정현이었다. 서림(지금의 일과리)은 중국에서 수풀 림(林)을 많이 쓰기 때문에, 서쪽의 숲이라고 해서 서림이라고 불렀다. 대정에서 안 나는 게 없기 때문에 대정현에서는 유배인사들이 굶어죽지는 않았다. 모든 산업의 중심벨트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정현에서 훈학도 하고, 교학도 하고, 철학 강의도 했다. 학문적으로 꿰뚫었던 분들이라 모관에서도 여기에 유학을 왔을 정도다. 대정향교는 동(東)재 서(西)재로 나눠있었다. 추사 선생이 궁금증이 있어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해서 의문당이라고 이름도 지어줬다. 유생, 서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데 김정희 선생이나 임진아 선생이나 신명규 선생 같은 분들이 강학을 많이 했다. 그 분들이 그때부터 이미 육지부에서 많이 퍼져있던 서당, 이런 것들을 열었다. 서당의 역사는 제주 성안보다 여기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서원도 상당히 일찍 생겼다. 대정현에 가장 늦게 온 유배 인사가 정난주 마리아다. 대정현에서 언문을 교학했다. 위생이나 해산, 육아, 조리, 더 나아가서 미풍양속을 많이 알렸다. 규방에서 글을 읽기 시작한 게 대정에서부터다. 유배문화가 낳은 것 중 하나가 정의를 수호하고 가렴주구의 전형들에게 항거하는 저항의 문화다. 대정현에서는 농민저항도 있었다. 대정현 마지막 현감이자 초대 군수인 채구석 군수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대정상무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1901년 신축교란이 일어난다. 임술농민봉기도 있었다. 그 저변에 깔려있던 게 유배문화였다. 1909년에는 의병 항쟁도 일어났다. 

목호의난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그 기간 동안 무참한 끔찍한 수탈을 당했던 곳이 대정현이다. 그 수탈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가렴주구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내려오다 보니 대정 사람들이 의심이 많다.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육지에서 왔다고 하면 의심한다. 

대정에는 4.3사건과 6.25 한국전쟁의 아픔이 있었다. 4.3사건때 가장 많이 피해를 보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이 오대전. 남로당 고위에 있던 사람들이 대정 출신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화 되었다. 당시에 보성초등학교 교사들이 7~8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48명이 한꺼번에 집단 살해된 마을도 있다. 동광리에는 큰넓궤라고 있다. 무등이왓, 헛묘 이런 것들이 대정 안에 있다. 도립곶자왈공원에 가 보면 대정면 군사위원의 아지트가 있는 곳이 있다. 안덕곶자왈도 무장대의 터전이었다. 미증유의 비극인 4.3을 끝으로 대정도 좀 괜찮아지나 했는데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을 훈련시설로 활용해서 제주도 병력은 물론 육지부에서 와서 훈련을 받아서 50만 군이 양성된 곳이 육군 제1훈련소다. 이곳에서 50만 대군이 양성되면서 어렵게 호국의 성지가 되었다. 

170818-03.png
▲ 김웅철 (사)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이 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 일곱 번째 연사로 나섰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제주의소리 기자
대정현의 역사, 지명 유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영어 교사로 교직에 근무하면서 향토사 사료 발굴로 미국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자료를 수집해 왔다. 사재를 털어서 먼 길을 갔는데, 향토사 사료 발굴차 몇 번 다녀왔나? 의미 있는 사료 발굴이 있었나?

김웅철
: 미국에 맨 처음에 갔을 때는 탐색 방문이 주였다. 어떤 게 있는지 매일 서고와 수장고에 가서 목록만 보는 것만도 하루가 금방 갔다. 그러다 한국인으로 리서치멤버 등록증이 발급이 돼서 두 번째 갔을 땐 면식이 있는 가드들과 장난도 쳤다. 그러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우리나라 정부나 민주도의 역사 문화 관련된 것을 추적하는 것에 소요되는 예산이 1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150이다. 중국은 아예 모른다. 왜냐면 인해전술도 있지만 자본을 투여하는데 아낌이 없다. 워싱턴DC나 메릴랜드에 가서 설전도 많이 벌였다. 우리나라는 이런 데 예산이 너무 부족하다. 활동에서 가장 현재 시점에서 가장 많이 좌우하는 바로미터가 재정지원이다.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면 소담스러운 결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특히 4.3관련 자료를 얻었다. 6.25 훈련부터 실전, 폭격, 이산가족이 만들어지는 연유, 더 나아가서 수복이 된 다음에 아쉬움. 부산에서의 생활, 특히 포로들과 관련된 것 등의 자료를 얻었다. 이런 기밀자료가 완화가 되는 단계가 톱에서부터 3급까지 오면 자료가 무더기로 개방한다. 나 말고도 다른 마니아들이 나타나서 자료들을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김봉현 기자
: 한국전쟁 당시에 모슬포에 특히 고아원이 많았던 시대적 배경이 있나?

김웅철 이사장
: 여러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17만 5000명 정도가 제주로 왔다. 그 중에서 7만5천명이 모슬포로 왔다. 전쟁이 일어나면 훈련소 같은 거대한 군사시설이 있는 곳은 보급이라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위, 먹을 것, 아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니 장사라도 할 수 있다. 문인, 예술가들도 많이 왔다. 천사보육원, 한국보육원, 홍익보육원 등 대정현에 속해 있었다. 

이재성 재밋섬 대표
: 피난민도 많이 내려오고 재력가들도 많이 오지 않았나? 당시에 땅도 많이 샀을 것 같은데.

김웅철 이사장
: 재력가는 부산에 있었다. 주민들이 가진 땅도 훈련소에 뺏기는데,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없었다.

이재성 대표
: 요즘에 뉴스를 보면 그런 땅들도 후손들이 나서서 되찾기도 하던데.

김웅철 이사장
: 전쟁이 끝나면서 다 돌려줬다. 그 중에서 알뜨르 비행장 근방 경작권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아주 싼 값에 해준 것들은 있다.

김봉현 기자
: 문재인 정부에서 알뜨르 비행장을 도민의 품으로 돌려준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김웅철 대표
: 화중지병이라고 할까?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본다. 공군이 비행장을 쥐고 있는데, 대토를 해줘야 한다. 그러면 가능할 것이다. 308 관제대대가 있다. 남북구조비행단 탐색구조비행단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저걸 양여한다는 건 어렵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성주 사드 배치하겠다는 걸 대정사람들이었으면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너무 이골이 나서 그렇다. 한국전쟁 당시에 1개 소대가 대정향교에서 기숙을 했다. 당시 마을 지도자가 나서서 아주 반대를 했다. 나중에 철수를 했다. 

어떤 사건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반드시 있다. 마라도와 가파도 사람들이 수탈을 많이 당했다. 가파도는 그 일대가 황금어장이다. 그 곳을 수탈당할 때 들여온 게 머구리 기술이다. 고구마가 제주도에 어떻게 들어온 줄 아는가? 가파도를 통해서다. 그래서 제주도 최초의 전분공장이 대정 서림(지금의 일과리)에 생겼다. 

김봉현
: 이 자리에서 추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김웅철
: 추사가 제주에 와서 한 것들이 정말 많다. 제주에 남겨져 있던 마애명도 추사가 해석하고 그랬다. 위리안치돼서 집밖에 나갈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지역의 토호들의 도움으로 많이 다니곤 했다. 이런 것들을 추사 연구를 할 때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추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건육포나 약초 이런 걸 짊어져서 추사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돌아오는 길에 두루마리같은 걸 받아왔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이건 잘 보관하라’고 했던 게 있는데, 내가 어릴 적에 딱지치기 한다고 다 찢어버렸다. 아버지께서 옛 어른들이 남긴 걸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혼도 냈다. 

추사 연구를 할 때는 좀 더 심층적으로 했으면 한다. 뻥튀기 된 것도 있다. 또 아예 줄어들어버린 것도 있다. 대정향교의 의문당이라는 필체가 걸려있음에도 추사가 와서 어느 집안 누구를 가르쳤는지 그런 연구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되고 있다. 대정에서 추사예술제를 매해 하는데, 제주에서도 문화재청과 손을 잡아서 학맥도 동원을 하고 인맥도 동원을 해서 예산도 잘 갖췄으면 한다. 

또 추사가 주고받던 서찰을 전해줬던 사람들이 서림(일과리)이나 명달동 서촌에서 살았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전해들은 구전이라도 조사하려고 하지 않고 추사라고 하면 글씨의 대가, 아니면 제주에서 가장 유배를 오래했던 어른,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라고만 알게 하지 말고 스토리텔링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