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17) 수박밭둑/ 장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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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 ⓒ 김연미

물큰한 썩은 내, 애기 수박들이 예쁘다. 파랗게 질린 넌출들이 막무가내로 밭둑을 기어오르고. 엄마 저승은 어느 쪽이에요? 아직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말똥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푸른 밭둑 무녀리 애장터.

- 장철문 <수박밭둑> 전문-

여름 더위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면 수박밭들도 뻗었던 넝쿨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폭염에 시달렸던 줄기들이 더러 마르기 시작하고, 크고 잘 생긴 것들에게만 쏟아지는 손길 옆, 보호받지 못하고 상처 입는 수박들 몇 그 상처에 목숨을 놓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 끝에는 새파랗게 새순이 돋고 새순 곳곳 새로운 꽃이 핀다. 뿌리 뽑히기 전까지 절대 희망을 놓지 않는 자연의 특별할 것 없는 순리다.

생과 사가 혼돈된 채 팔월의 끝자락을 맞고 있는 수박밭둑에서 장철문 시인의 ‘수박밭둑’을 생각한다. 저승을 피해 밭둑을 기어오르는 수박넌출들과 저승이 어느 쪽이냐 묻는 맑은 영혼들의 말똥한 눈망울. 주어진 시간 위에 차곡차곡 놓여 있는 계단 하나를 건너는 과정일 뿐이라고, 물기 싹 지워 받아들이겠다 하여도 시선이 자꾸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돌아온 짐꾸러기에서 제 머리보다 더 큰 수박 두어 개 꺼내 하나를 건네던 친구의 얼굴을 생각한다. 수박 한 덩이 사 먹기가 쉽지 않았던 자취생들이기는 했지만 먹으려고만 한다면야 얼마든지 동네 슈퍼에서 사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며 와야 하는 편하지 않은 길에, 굳이 그 무거운 걸 가져와 내게 건네던 그 애의 마음을 생각한다. 수박 속처럼 붉은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지는 것은 그 때 우리가 주고받았던 것이 단지 수박 한 덩이에 불과했던 건 아니라는 증거일 것. 여름이 지나고 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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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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