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연구소는 22일 오후 1시 30분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제주3.1사건 제7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제주4.3연구소 '3.1사건' 국제학술대회...“미군정 영향, 제주·대구·대만까지 미쳐”

‘제주4.3의 도화선’ 3.1기념대회가 벌어진 1947년. 그 시기는 제주 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 바다 건너 대만까지 국가폭력의 광풍이 몰아쳤다. 지역에서 벌어진 개별 사건이 아닌 미국·소련 냉전 갈등 속에 일어난 거대한 역사의 흐름임을 증명한다. 특히 3.1기념대회를 이끈 주도세력에 대한 비판 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원해 뛰쳐나온 무수한 도민들의 외침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제주4.3연구소는 22일 오후 1시 30분 제주시 아스타호텔에서 <제주3.1사건 제70주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술대회는 3.1기념대회 발포 사건이 불러온 여파와 함께 동시대에 벌어졌던 국내외 정세를 함께 살펴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됐다. 주제를 ‘제주3.1사건과 1947년 동아시아’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제주를 ‘동양의 그리스’로 판단한 미국

학술대회는 1부(동아시아의 1947년), 2부(제주3.1사건, 그리고 한국사회)로 나눠 진행됐다. ‘1947년 냉전체제의 형성과 제주도’를 발표한 허호준 기자(한겨레신문)는 3.1기념대회 당시 발포사건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않은 미군정의 책임을 강하게 제기했다. 나아가 당시 미국 정부는 사회·경제 문제가 극심했던 그리스와 제주도를 동일시 여기면서, 제주도를 '공산주의 섬'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허 기자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7년 3월 일명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는데 이는 미국이 고립주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개입주의 외교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며 “트루먼 독트린의 기조 하에 동아시아에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은 남한에서 반공 우익 정권의 수립을 추구했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우익세력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 왼쪽부터 주립희, 문경수, 이규배, 허호준, 박찬식 씨. ⓒ제주의소리

특히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기 12일 전,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3.1사건’이 발생했다. 이보다 하루 앞서 대만에서는 2.28사건이 일어나 수 만 여명의 대만섬 민중이 국민당 군대에 학살됐다”며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비무장 시민들에 대한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3.1사건은 제주4.3의 도화선이었다”고 덧붙였다.

허 기자는 “이러한 사태의 귀책사유의 상당 부분은 미군정에 있다. 3.1기념대회 발포 사건 이후 미군정이 발포자와 발포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처벌을 했더라면 ‘3.10 민관 총파업’의 명분은 없었을 것이며, 극우파 유해진 도지사의 독재적 행정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미군정이 그를 신속하게 경질했더라면 4.3무장봉기의 대의명분은 약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제주4.3에 대한 미국 관리들의 태도는 제주도를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보고, 공산주의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인식했다”며 ▲1948년 5.10 선거 이전 군정장관 딘 소장의 방문과 경무부의 대응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의 제주도 파견 ▲브라운 대령의 토벌작전 지휘 ▲미군 연락기 L-5의 활용과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작전 격려 ▲주한미대사 무초와 하지 사령관의 전 정치고문관인 굿펠로우 대령의 이승만 격려 ▲1949년 5.10재선거를 앞둔 미대사관 관리의 현지 시찰 등을 예로 들었다.

주립희 교수(대만 국립정치대학교)는 대만 2.28 학살 사건과 제주4.3의 배후에는 ‘연합군 도쿄 총사령부(GHQ)’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 교수는 “GHQ의 암묵 또는 명령이 없었다면 대만과 제주에서 이런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4.3은 GHQ의 명령으로 주한미군정이 집행한 사건이며, 2.28 당시 대만에 주둔한 미군은 없었으나 중국에 주둔한 미군사령관의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GHQ의 묵인이 없었다면 대규모 학살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대만과 제주는 국제연대로 국제 인권 기구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당사국의 책임소재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 3.1사건 주동자? 무수한 도민 여론 주목해야

양정심 교수(성균관대학교)는 주제발표 ‘1947년 제주3.1기념대회 주도세력에 대한 소고’에서 3.1기념대회에서 활동한 인물 상당수가 4.3 봉기의 주도세력임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이념적인 시각 대신 평범한 도민들의 열망에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양 교수는 “제주도민들은 3.1기념대회에서 3.1절을 기념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정치적·사회적 요구를 표출했다. 미군정도 경찰도 막을 수 없는 인파가 관덕정에서, 북국민학교에서, 한림국민학교에서, 제주도 전역에서 기념식을 치르고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민주적 정부 수립의 열망을 소리 높여 외쳤다”고 밝혔다.

▲ 왼쪽부터 김종민, 노영기, 양정심, 고희범, 김상숙, 김창후 씨. ⓒ제주의소리

양 교수는 3.1기념대회와 총파업을 주도한 세력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이었다고 봤다. 남로당 도당 겸 민전위원장 안세훈, 남로당 제주읍당책 강규찬, 부녀부장 고진희, 대정면당 김달삼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3.1기념대회, 3.10총파업을 거쳐 4.3 당시 무장 활동을 주도한다. 

양 교수는 “3.1기념대회의 핵심인물이었고 4.3봉기의 주도 인물이었던 이들을 포함해서 좌익세력에 대한 평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그들만이 남로당과 민전의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는 평범한 하급당원이, 평범한 마을 청년들이, 평범한 제주도민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속에서 그들과 같이 한 시간들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좀 더 나은 세상,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은 잘 살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진정한 독립의 세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열망이 함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이 대중을 선동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이 혹은 다른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이끌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을까?”라고 반문하며 “최소한 해방정국, 1947년 3월에 제주도민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역사를 대면하는 존재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미군정의 부당한 조치에 반발한 불길, 전국으로

김상숙 교수(단국대), 노영기 교수(조선대)는 3.1기념대회와 비슷한 시기에 대구, 전남 지역에서 벌어졌던 시민항쟁에 주목했다. 대구에서 벌어진 10월 항쟁은 1946년 9월 노동자 5000명이 참여한 총파업을 시작으로 10월 1~2일 시민 1만 5000명 이상 참여한 집회를 일컫는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계엄령으로 빠르게 사그라들었지만, 경북을 비롯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됐다. 

김 교수는 대구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이유를 ‘미군정과 보수세력’에게 돌렸다.

그는 “미군정은 해방 후 1년 동안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토지개혁을 지연하고 건국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1년 밖에 되지 않는 민중에게는 일제 식민지의 악몽이 되풀이 되는 것과 같았다”며 “10월 항쟁은 단순히 좌익세력이 사주한 폭동이 아닌 민중의 자주적인 항쟁으로 재규정해야 한다. 10월 항쟁과 4.3 항쟁 모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건국 운동과 분단정부 저지를 지향했던 장기 항쟁의 흐름속에서 지역사를 넘어 전국사적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교수 역시 전남지역에 퍼진 항쟁의 ‘불길’이 대구와 같은 원인이라고 봤다.

노 교수는 “대구 10월 항쟁은 전남 서남부지역과 동부 몇몇 지역까지 11월 봉기로 퍼졌다”며 “군중들이 경찰지서를 불 지르고 경찰관을 구타·살해하거나 면사무소, 신한공사 창고 등을 습격해 문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같은 행동은 당시 봉기에 참여했던 대중들의 불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특히 3.1기념대회에서 경찰이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한 제주처럼 순천, 나주, 구례, 보성 등의 지역에서 충돌과 발포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발표에 대해 토론자들은 3.1기념대회 성격을 재조정하는 의미있는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은 “3.1기념대회를 전후해 나온 슬로건을 보면 ▲3.1운동 만세 ▲삼상회의 절대지지 ▲10월 인민항쟁 만세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자 ▲공출반대 ▲친일파 처단 ▲부패경찰 몰아내자 ▲남녀차별 반대 ▲양과자 먹지말자 등이었다”며 “이들 주장은 정치·사회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적폐청산’도 아울러 주장한다”고 해석했다.

김종민 전 4.3위원회 전문위원은 “서울 중심의, 서울 관점만의 역사에서 벗어나 전문연구자들이 각 지방의 역사를 함께 논의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특히 1947년 3월 무렵의 상황이 제주, 호남, 영남 등 특정 지역만의 독특한 상황이 아니라 당시 한국사의 보편적 역사임을 밝히게 된 점은 큰 의미”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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