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8) 명주옷은 육촌까지 따습다

* 맹지옷 : ‘명주옷, 비단옷’의 제주방언, 명주(明紬, 견직물)
* 꼬지 : ‘까지’의 제주방언. 조사(부터 까지)
* 도신다 : ‘따뜻하다, 따습다’의 제주방언. 다시다. 또똣하다〉 따뜻하다. 따습다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부귀한 몸이 되면, 그 도움이 은연중 자신에게까지 미친다. 한 혈족으로서 친척은 물론 매우 가까운 사람이 잘되면 은연중 그 덕을 입게 된다는 것을 빗댐이다.

‘사촌까지 따습다’라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사촌, 육촌이라는 촌수(寸數)는 굳이 친척관계의 원근(遠近)을 말하려는 의중이 아닐 것이다. 

친척은 멀든 가깝든 피붙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형제로, 숙질간으로 혈연(血緣) 그 자체다.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그 연(緣)이 그지없이 소중하다. 이를테면 고조(高祖) 밑이면 어느새 8촌이 된다.

실은, 친족이라는 말은 법률용어다.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은 ‘친척’이고, 그렇게 말해야 친근하고 자연스럽다. 

법률에서, 친척의 범위는 8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姻戚)이다. 특히 부계(父系)의 연속성이 강조되는 우리 사회의 속성에서 아버지 쪽 혈족들과 더 많은 접촉을 하게 된다. 친척은 가장 끈끈한 혈연공동체다. 경조사 등 큰일에서 집안 가사 범절에 이르기까지 서로 간에 나누고 함께 짐 지는 게 친척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인물이 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 한다. 당연한 얘기다. 더욱이 개천에서 용 났다 생각해 보라. 걸출한 인물의 탄생을 그냥 앉아 바라보기만 할까. 온 집안, 권문일족이 일어나 덩실 더덩실 춤이라도 출 일인데….

반드시 그 덕이 직접 자신에게 미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집안에 세인이 우러러보는 인물이 났다는 사실만으로 기쁘고 자랑스러운 것이 아닌가. 경사가 따로 있지 않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자랑하게 되리라. 
  
‘맹지옷’은 벼슬자리를 상징한다. 벼슬아치 옷이니 고급이고 따습다. 그냥 명주옷이 아닌. 명주옷 중에도 고급으로 벼슬아치가 입는 비단옷을 의미한다. 금의환향(錦衣還鄕),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입는다는 바로 그 비단옷, 금의(錦衣)다.
  
명주는 옛날 울릉도에서나 나던 귀한 옷감이었다. 누에고치 말리기→실뽑기→베틀로 짜기, ‘명주길쌈’이 공들여 빚어낸 고운 천이다. 웬만한 시간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라 혼기 꽉 찬 아리따운 규수들이 길쌈을 배워 섬섬옥수로 짰다. 부드럽고 광택이 나 번지르르했다. 혼수용품, 도포 등 외출복, 설과 추석명절 예복이며 이불까지도 명주로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명주옷에 노랑 물을 들일 때는 행경피나무 삶은 물을 이용했다. 세탁비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주옷은 양잿물로 빨았다. 그 이전에는 부엌 아궁이 재를 물에 풀었고. 그렇게 서민의 삶이 녹아든 것이 명주옷이다.

이를테면 명주에 등급을 매겨, 하급은 그냥 명주옷이고 고급 쪽은 비단옷이다. 그러니 속담 속의 ‘맹주옷’은 두 말할 것 없이 벼슬로 관직에 오른 사람이 입는 비단옷을 의미한다.
  
‘명주옷은 육촌까지 따습다’ 

친척 중에 자랑스러운 인물이 나면 추석명절에 ‘맹주옷’을 입고 올 것 아닌가. 꼭 그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귀한 자리에 오르면 사람이 그 옷이다. 

차례를 지내고 풍성한 명절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일가(一家)에 이야기꽃이 만발할 것은 불문가지다. 설령 그게 어제의 일이면 웬 상관이랴. 몇 년이 지난 일이라도 집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쁜 일은 만나면 꺼내 놓게 되는 법이다. 친척들 입에서 나오는 자랑이 곧 육촌까지 따뜻하게 하는 그의 덕이다. 다름 아닌, ‘맹주옷’ 입은 자랑스러운 자손의 온기다.

추석을 한가위라 한다. ‘가위’는 한가운데를 의미하며 ‘한’은 ‘한길, 한글’처럼 ‘크다’는 뜻이다. ‘크다+가운데’이니 8월의 ‘한가운데, 큰 날’을 말한다. 큰 날, 큰 명절이라 함이다. 달빛이 유난히 좋은 날이라 ‘월석(月夕)’이란 운치 있는 말도 있다.

추석 무렵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절기다.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 하지 않는가. 5월은 농부들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땀을 흘리면서 등허리가 마를 날이 없지만, 8월은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된 때여서 봄철 농사일보다 힘을 덜 들이고 일을 해도 신선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 추석은 그렇게 좋은 날이다.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 했다. 오곡백과가 익어 거둬들이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지낸다. 추석날처럼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한 날이다.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형제들, 삼촌 조가들, 손자 손녀들이 모여든다. 귀성하는 사람들과 마중 나온 이들로 공항과 부두터미널이 북적거린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냐, 그래 왔구나. 내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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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만나는 손자를 반기는 할머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여기저기 가족 사랑의 말과 넉넉한 웃음으로 넘친다. 어른의 넓은 품으로 달려들고, 금쪽같은 손주를 끌어안는 가슴 벅찬 장면들이 이어지는 만남의 현장.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기만 하다.

“맹지옷은 육촌꼬지 도신다” 

친척 중에 귀한 인물이 나면 그 명성이 집안에 두루 미치게 마련. 다들 집안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 마음, 그와 한 할아버지 자손으로 한 집안에 태어났다는 자긍심, 그것처럼 사람을 생광(生光)하게 하는 것이 있으랴.
  
먹물은 화선지에 번져 수묵(水墨)을 그리는 법이고, 잿속에 묻어 놓은 정동 화로의 불씨는 은근한 온기로 방안을 오래 덥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유난히 달 밝아 좋은 추석날, 마음속에 깊이 새길 일이다. 

“맹지옷은 육촌꼬지 도신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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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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