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9) 하는 말이 고우면 두부 사러 갔다가 비지라도 사고 온다

* 고우민 : 고우면
* 둠비 : 두부
* 사래 : 사러
* 갓당 : 갔다가
* 비제기 : 비지. 콩으로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 맛이 고소하다

우리말 화법을 가만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지언정 ~못하겠다’라 하면 상대의 요구나 원을 들어주지 못한다는 부정적 서술 쪽이 강하다. 한데, ‘~한다면 ~한다’는 반대로 상대가 마음을 움직여 ‘하겠다’는 긍정의 의사를 나타낸다. (~한다면 하고 조건을 내세우긴 해도) 상대의 긍정은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고, 부정은 상대의 반대편에 선다는 의미다. 
  
이 경우, 긍정과 부정은 자그마치 하늘과 땅 차이다. 그만큼 말에서 우러나오는 뉘앙스가 달라지면서 말이 가리키는 방향성에서도 대립한다. 말이란 참 묘한 것이다.

‘말이 고우면 가게에 두부 사러 갔다가 (설령 두부가 떨어져 없더라도) 대신 비지라도 사고 온다.’ 말 한마디가 지니는 효과가 큰 것임을 실감케 된다. 그만큼 말이 때론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경우를 뒤집어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손님에게 “두부 없어요” 하고 쌀쌀맞게 내뱉었다면, 누구든 바로 등을 돌려 버릴 것이고 어쩌면 다시는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게는 많다.

고객을 왕이라 말은 하면서도 우리 문화는 아직도 이런 쪽이 세련되지 않고, 후하지도 못하다. 길거리에서 껌 한 개만 사도 생글생글 빗물에 씻은 풀잎처럼 환한 웃음 띤 얼굴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아리가또’를 연발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그 인사가 오늘의 경제대국을 일궈 낸 씨앗인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라 문제가 될 뿐이다.

우리말에는 유난히도 말에 관한 속담이 많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라거나, “오는 방망이에 가는 홍두깨”,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떡 간 듼 떼어 먹곡, 말 간 듼 더 부튼다(떡 간 데는 떼어 먹고, 말 간 데는 더 붙는다)”, “떡을 돌릴수록 족아지곡, 말은 돌릴수록 커진다(떡은 여럿에게 돌릴수록 작아지고, 말은 여기저기 돌릴수록 커진다)”….
  
『삼국유사』에 ‘국중대회 연일음식가무’(國中大會 連日 飮食歌舞 : 나라 안에 큰 모임을 열어 며칠을 두고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췄다)라 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노래와 춤을 즐겼듯이 말을 무척 좋아해 말에 말이 덧붙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을 잘하는 것은 다변(多辯)이지, 달변(達辯)이 아니다. 말을 잘못해 어눌하다고 눌변(訥辯)이라 하지만, 말 많은 것보다 차라리 나을 수 있다.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 설화(舌禍)를 입는 수는 왜 없으랴. 때로는 인심이 야박해 품격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할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에게서 내명(內明)한 현자(賢者)의 덕을 보게 된다. 그런 분에게는 진정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고운 말을 쓰는 이유가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기 때문이다. 말로 은연중에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므로 고운 말을 써야 품격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그렇다. 또 남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다. 

말도 인간의 사회화의 한 과정이다. 말을 통해 사회를 학습하고 문화에 젖어 들 수 있는 것이다. 풀잎에 이슬이 스미듯 그렇게. 그러니 고운 말을 쓰면 얼마나 좋은가.

고운 말은 겸손한 말이고 예의 바른 말을 이름이다. 

두부 집 주인의 말이 고우니 둠비(두부)가 없다 하자, “그럼 비제기(비지)라도 줍서(주세요)” 했을 것 아닌가. 말에 예의를 세우며 안으로 녹아들면 상대를 사로잡게 되고 마침내 마음을 움직인다. 

싼 게 비지떡이라 하나 그렇지만도 않은 게 세상 이치다. 둠비를 만들다 남은 비제기엔 뜻밖에 많은 영양성분이 들어 있다. 맛도 여간 고소하지 않다. 된장찌개에라도 넣으면 그야말로 별미다. 둠비 대신 그만 못한 비제기를 팔고사고 했으니 주인이나 손님 피차간 좋은 일이 아닌가. 참 자연스럽다. 말이 만들어 놓은 따스한 거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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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한마디의 말을 만나기 어려운 삭막한 세상이다.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면 세상이 따뜻해진다. 말이 고와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주고받는 말은 모름지기 따뜻해야 한다. 그게 사람 사이의 온기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값비싼 선물보다 훨씬 큰 가치가 느껴진다.
가끔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빛나는 보석보다 더 큰 감사가 돼 주기도 한다.
어떨 땐, 응원의 말 한마디가 귀한 보물보다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말의 효용이 실제 이렇다.

좋은 선물은 값비싸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다. 배려하고 감싸 주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선물이란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을 건네받는 그런 소박한 것이다.

가령 말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해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 말의 속성이다. 더구나 상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칭찬의 말, 위로의 말은 우애롭다.
  
이를테면 상대에게 이런 말은 어떨는지.
  
“최선을 다했으니 된 것이지요. 어찌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과정에서 시들어 가는 모습을 생각하겠어요? 당신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이에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일 거예요. 새로운 실패 앞에서는 절대로 주눅 들지 말아야 해요. 실패는 달리 말하면 경험입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 또한 없지요. 사람은 뭔가를 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게 돼요. 시도했으나 제대로 무엇 하나 해내지 못했을 때에도 사람은 성장합니다.”

“말이 고우민 둠비 사래 갓당 비제기 사온다”

말은 소통을 매개한다. 소통하기 위해 하는 게 말이다. 이왕 주고받을 바엔 진실한 마음으로 할 일이다. 역지사지, 상대의 처지가 되면 더더욱 좋다. 두부 사러 갔다 허탕 칠 뻔한 사람에게 두부 대신 비지라도 사들고 가게 하는, 마음을 열어 놓는 정겨운 한마디의 말.
  
그런 한마디의 말을 만나기 어려운 삭막한 세상이다.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면 세상이 따뜻해진다. 말이 고와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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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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