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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고비를 넘기고 다시 제주지방경찰청 특공대 전술 1팀장으로 복귀한 김석철 경위. 김 팀장은 한쪽 시력을 잃은 뒤 두 눈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경우가 있어 평상시 안경 등으로 눈을 가리고 다닌다. 기자와 만날 당시 김 팀장은 모처럼 용기를 내 선글라스를 벗고, 자신이 겪은 일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경찰의날] 불의 사고로 생사고비 넘기고도 특공대 복귀한 김석철 팀장 "난 현장 체질" 

머리를 크게 다친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이마와 코 대부분의 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한쪽 눈은 보이지가 않았다. 의사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환자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자신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다 만삭인 아내와 3살 난 아들이 떠올랐다. 이 악물고 재활에 나섰다. 결국엔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그의 직장은 제주지방경찰청 특공대. 김석철(39) 전술 1팀장(경위)의 얘기다.

현재 우리나라 경찰관은 11만6914명, 특공대는 전국에 396명 뿐이다. 전체 경찰의 0.3%다. 

 ‘제72주년 경찰의 날’(10월21일)을 사흘 앞둔 지난 18일, 역경을 딛고 일어선 김 팀장을 만났다. 밝은 모습으로 기자를 맞은 김 팀장에게선 긍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표정이 밝다고 하자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있고,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서 그런 것 같다”고 쑥쓰러워 했다.

서울 출신의 김 팀장은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 꿈이었다. 서울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 1997년 명예퇴직한 아버지와 같은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5년 10월27일 제주에 경찰특공대가 출범했다. 특전사 출신으로 신체 능력이 남달랐던 김 팀장은 경찰특공대 창단 멤버로 순경으로 특채됐다. 어릴적 꿈을 이룬 것이다.  

사고는 불시에 찾아왔다. 2013년 3월이었다. 당시 그의 직급은 경사였다.

유난히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 레펠 훈련이 예정됐다. 훈련이 가능한지 모호한 상황에서 자신이 먼저 해보고 판단하겠다며 15m 높이에서 레펠을 시도했다.

평소처럼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김 팀장이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개방성 두개골 골절, 개방성 머리뼈 바닥 골절, 경추염좌, 뇌척수액 누출, 다발성 타박상, 대뇌좌상, 시각피질의 장애, 외상성 경막하 출혈, 외상성 시신경 병증, 뇌척수액 누출, 외상후 상처 감염...
 
진단서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증세가 빼곡히 적혔다. 무려 8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수시로 수술실 밖으로 나와 김 팀장의 상황을 아내에게 전했다.

“생명이 위독하다”
“살아날 가능성이 낮다”
“목숨을 건져도 뇌염으로 치사율이 70%에 달한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 김 팀장이 사고 이후 병원에서 치료받던 상황을 얘기하며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고 5일 뒤 눈을 뜬 김 팀장은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신체건강 만큼은 자신있던 그였기에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도 차마 보기 어려웠다. 더구나 당시 김 팀장의 어머니는 난소암 말기 환자였다.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도 의사는 그에게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더이상 '민중의 지팡이'는 될 수 없다니...눈앞이 캄캄했다. 

오른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시력이 2.0에 달했던 왼쪽 눈은 1.0까지 떨어졌다. 머리를 크게 다치면서 시신경이 손상돼 수술을 한다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또 이마와 코뼈가 으스러지면서 평생 비염을 안고 살아야 했다. 더이상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 한 달 정도 흐른 뒤 아내가 둘째를 출산했다. 둘째 얼굴을 보니 김 팀장은 아버지가 떠올라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다짐의 다짐, 또 다짐한 그는 재활에 나섰다. 사고 이후 1년 동안 김 팀장이 받은 수술만 6차례. 2015년 마지막으로 8번째 수술을 받았다.

평소 담배도 하지 않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김 팀장은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실명으로 시야가 좁아졌지만, 서서히 익숙해졌다. 회복도 남들보다 빨랐다. 다시는 경찰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던 의사도 김 팀장의 회복 속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6개월. 김 팀장은 경찰로 복귀했다. 생사고비를 넘긴 후 복귀한 경우는 제주경찰 특공대에서 그가 처음이었다. 다만, 보직은 현장이 아닌 내근직으로 바뀌었다.

내근업무를 보면서도 김 팀장은 꾸준히 운동했다. 다시 현장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2014년 특공대 경위 승진 시험에 도전했다. 합격이었다. 암을 앓고 있던 어머니에게 승진 소식을 알렸다. 크게 기뻐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아들이 경위 계급장을 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승진과 함께 김 팀장은 다시 현장으로 가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누군가에겐 가슴이 무너질 수 있는 소리였지만, 아내는 말리지 않았다. 남편이 그동안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잘 할 수 있다며 응원해줬다.

▲ 지난 18일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에서 이뤄진 대테러훈련 당시 김 경위(가운데). 전술 1팀장으로서 팀을 통솔하고 있다.
현장으로 복귀하겠다는 김 팀장 말에 특공대 간부들이 내부 회의를 가졌다. 그가 현장에 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가 회의 주제였다. 특공대라는 업무 특성상 개인의 의지를 떠나 뛰어난 신체능력 등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회의 끝에 김 팀장의 복귀가 결정됐다. 그간의 노력 덕분에 현장에서도 무리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김 팀장은 제주지방경찰청 특공대 전술 1팀장에 올랐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살고 있는 김 팀장은 '긍정의 힘'을 스스로 깨우쳤다.

지난 18일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에서 대테러훈련을 소화하다 잠시 만난 김 팀장은 “죽다 살아나니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팀장으로서 다시 현장에 나설 수 있게 해준 특공대원들에게 감사하다. 대한민국 경찰, 제주 경찰 모두가 나처럼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며 “앞으로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한 명의 경찰로서 역할을 다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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