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9) 목안 놈 앉았던 데는 풀도 안 난다
 
* 목안 : 목(牧) 안. 여기서는 주로 옛 제주목(濟州牧)의 중심지인 지금의 제주시를 가리킴
* 앚아난 : 앉았던. 앚다→앉다 
* 듼 : 데는. 듸→데(곳)

제주목 안에 사는 사람이 앉았던 자리엔 풀도 나지 않는다고 한 데는 연유가 있었다. 제주목은 말 그대로 옛 제주의 중심지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이 모름지기 사리에 밝은 체하고 약삭빨랐기에 나온 말이다. 오랜 시간 속에 쌓인 지역에 대한 비아냥거림에 혐오감마저 배어 있다.
  
옛날 제주도가 탐라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 위상을 상실하고 고려 때부터 본토에 예속되면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러 1목(一牧)·2현(二縣)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됐다. 1목은 제주목이고, 2현은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을 이름이다.

그 중 제주목은 2현을 거느리는 목사가 집무하는 곳으로 제주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관중에 산답시고 우쭐대기 일쑤였기로, 제주목 아닌 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몹시 얄밉고 눈꼴사납게 보였을 법도하다. 
 
“목안 놈 앚아난 듼 풀도 안 난다”라 함은, 지역 변두리에 살면서 잰 체하며 본 내는 당시 세상의 중심권 사람들을 비꼬아 한 말이다.

이에 한 수 더 떠 “대정 몽생이 요망진 체허여도 목안 가민 맥 못 춘다”고 할 정도였다.
  
대정이 어떤 곳인가. 지금의 대정읍은 제주 섬에서도 가장 바람이 거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했으면 옛 이름인 모슬포를 희화(戱化)해 ‘못살포’라고까지 했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이런 풍토성은 그곳 지역 주민의 기질을 아주 강하고 야무지게 만들어 놓았다. 제주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일이 아닌가 한다. ‘대정 몽생이’라 일컫는 것 또한 단순히 ‘대정 망아지’를 넘어 대정고을 사람들의 강인한 체질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대정 몽생이가 내로라 다부진 척하면서도 지역 안에서만 행세하는가. 목안에 가면 맥을 못 춘다니. 그도 그럴밖에. 워낙 목안 사람들 텃새가 셌으니 시골 사람 그곳에 들면 기를 펴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까 대정 몽생이(대정 사람)가 제아무리 똑똑한 체해도, 제주목 관아가 있는 목안에만 가면 주눅 들어 제대로 행세하지 못한다 함이다.
  
넌지시 빗대고 있는 행간의 뜻을 짚어 보면 실실 웃음이 나온다. 유별나게 뛰어난 대정 사람들의 당찬 모습을 바라보면서, 딴 마을 사람들이 조금 시새움해서 빈정대는 투로 한 말일 것 아닌가. 그 정도로 대정 몽생이들이 여간 당차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 가지 덧붙여 다른 얘깃거리가 있다.

“목안 놈 앚아난 듸 풀도 안 난다” 못지않게 제주지역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이 있다. 

“조천 사름 앚아난 듸 풀도 안 난다.”

제주의 동쪽에서 많이 들어서일까. 아마도 ‘목안’의 자리에 ‘조천’이 들어간 이쪽이 더 많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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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3월 1일 제주시 조천읍 만세동산에서 열린 제98주년 3.1절 기념식 및 만세운동 재현 및 대행진 행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조천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일으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국에서 개성과 조천 두 지역이었다 한다. 그리고 1919년 기미년 3‧1 운동 때 열네 분 애국 열사가 만세동산에 올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른 뒤 일경의 총칼에 맞서 결연히 항쟁했던 독립투사의 고장이 아닌가. 그때 만세를 불렀던 동산을 중심으로 ‘제주항일기념관’과 ‘기미독립운동 성역화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해마다 삼일절 기념식이 이곳 만세동산 언저리에서 치러진다. ‘삼일의 맥(脈)’을 오늘에 이어 가려는 지역민들의 민족의식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조천읍사무소 청사에 높직이 지역민들의 이 굳건한 정신이 일곱 자 속에 담겨 걸려 있다. ‘민족자존의 고장!’

조천 하면 오래전부터 일본말로 머리가 좋다 해서 ‘아다마 조덴’, 입으로 하는 말이 세다 해서 ‘구찌노 조덴’이라 해온다. 아마도 대정 못지않게 야무지고 당차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귀에 익을 만큼 들어온 말이 ‘조천 사름 앚아난 듸 풀도 안 난다’였다. 제주도 동서 두 고장이 비슷한 지역적 풍토성을 지니면서 속담으로 오르내리니 자못 흥미롭다.

이 속담도 해석 나름 아닐까. 

‘앉았던 데 풀도 안 난다’라 했지만 그만큼 어려운 현실을 이겨 내던 강인한 정신이라고 보면 좋다. 땅은 척박한데다 해마다 몰아치던 거센 비바람에 맞서던 지역 사람들의 강건한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나니.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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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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