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耽羅巡談)] (44)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제주비엔날레 2017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탐라순담’은 탐라 천년의 땅인 제주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토크쇼·집담회·좌담회·잡담회·세미나·콜로키움·거리 발언 등 다종다양으로 제주의 현안과 의제에 대해 이야기(談)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누구나 주인공이자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약 50회에 걸쳐 ‘제주 하간듸’(많은 곳)서 ‘제주 사름’(사람)이 ‘제주를 곧는’(말하는) 탐라순담이 열립니다. 제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여러 담론 속에서 제주의 가치, 제주의 현안을 길어 올리고 사회적 예술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탐라순담[耽羅巡談] 마흔네 번째 순서는 디아스포라로 평생을 산 제주 출신 고(故) 송영옥 화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다뤘다.

지난 15일 오후 2시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김복기 아트인컬쳐 대표가 ‘송영옥과 디아스포라 미술’을 주제로 마흔세 번째 탐라순담을 진행했다. 14일 개막해 내년 2월 25일까지 열리는 ‘광주시립미술관-제주도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송영옥 화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 정착해 일관된 주제의식과 독창적 작품세계를 인정받으면서 재일한국인 1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소학교 4학년이었던 1926년, 측량기사인 부친을 찾아 오사카로 건너갔고 일본에서 평생을 살다가 1999년 도쿄에서 눈을 감았다.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로 분류되었지만 그는 남한, 북한,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증명하기 힘든 현실과 가난, 차별, 소외, 냉대 등 갖은 고난 속에서 송 화가는 특유의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경험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화가의 작품에는 특유의 암울함, 음울함, 차가움이 깔려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의 실존적 고민을 비롯해 인간소외, 김대중 납치사건, 베트남전쟁, 히로시마 원폭문제, 5.18광주민주화운동, 인권 유린 등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송 화백의 작품을 보면, 자기가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그 생애를 마치 일기 쓰듯이 처절하게 기록했다. 사회적 발언, 자전적 예술 측면에서는 송영옥만큼 강렬하고 솔직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다. 송영옥 화백이 디아스포라로 가장 불행했던 시대의 역사, 그 기억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데 자이니치가 그려낸 민족사가 우리 미술사에 편입되었을 때 주는 의미가 크다. 그의 작품이 고향 제주에 왔다는 건 그의 예술이 부활해 살아있는 게 아닐까.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 제주 출신 화가 송영옥 탄생 100주기가 올해다. 지난 8월에 광주 시립 가족 미술관에서 전시가 이뤄졌다. 전시회 끝나고 오게 되었다. 역시 고향이니깐 광주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송영옥과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먼저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말로는 이주, 이산이라는 뜻이다. 디아스포라는 원래는 팔레스타인 세계각지 흩어지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유태인들을 뜻한다. 이 의미가 확장 되서 자국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의 관습과 민족을 유지하는 집단을 말한다. 대부분 뜻은 알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주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구한말부터 시작된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금의 중국 러시아 바다 건너 구한말부터 시작해서 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디아스포라가 많이 일어났다. 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해외에 있는 한국 교포가 600만을 넘은지가 오래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에 조선족이 거의 200만 명이고 일본은 60만 명. 해방이후에는 미국이나 유럽에도 많다. 한국 디아스포라도 시대, 지역 간의 지역의 정치체제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연변 조선족자치주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이나 1930년대 스탈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곳에서의 한국인을 고려인이라 한다. 일본인은 자이니치라고 재일조선인이라고 했다. 해방이전의 한국 디아스포라는 대체로 타의적인 면이 있다. 두만강이나 압록강에서 강제 이주 되었다. 용정, 연변 부근도 국내에서 일제의 압박으로 견디지 못하고 건너 살면서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강제 징용, 강제 노예도 타율적으로 이뤄졌다.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의지와 관계없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 어떤 쪽의 경제주가 많다. 이른바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갔다. 유럽의 경우 1960년대 경제 광부나 탄광 등 독일의 화가 중에서 간호사 출신도 있다. 
이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있는 2개의 한국을 디아스포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상당히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다. 더 한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사회일 수도 있다. 제 3의 형국은 어쩌면 한국보다 한국적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한국 디아스포라다. 최근에는 디아스포라라는 것이 약소국가의 국민이 강대국가의 국민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더 나은 곳으로 된다. 강제이주 자체가 이 약속의 국민을 이주시킨다. 이제는 최근에는 우리 디아스포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변화 된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100만을 넘어섰고,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산물이다. 한국 시골에 디아스포라는 이제 이해했을 것이다. 

그 디아스포라 중에서도 송영옥 화백은 자이니치다. 재일교포사회의 디아스포라는 어떤 것이 있는가? 재일교포사회라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형성되었다. 제일 큰 특징은 해방되고 나서 분단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일본 내의 한국인 사회에서도 똑같이 남과 북의 제일 분단이 생겼다.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북한 쪽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라는 단체가 있었고, 1970~80년대 초까지도 텔레비전에는 조총련계를 다루는 드라마도 꽤 있었다. 재일교포는 이런 점에서 상당히 달랐다. 남북관계에 있어 대리전이 일본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디아스포라 작품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본 디아스포라의 작품으로, 우리 송영옥 화백의 작품을 모아놓은 곳이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이다. 일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압축해온 많은 것들을 소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하정웅 재일교포 2세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자이니치 미술을 모으게 되었다. 광주에 강형욱이 그린 하정웅 씨다. 가령 이런 작품이다. 재일교포의 삶을 조총련계가 움직인다는 말이 있었다. 국적이 조선이어서 특별히 조직되었다. 1950년대는 우리보다 북한이 더 잘 살았다. 조직화도 잘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국적을 조선으로 둘 뿐만 아니라 조총련계로 많이 가입되어있었다.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조총련계의 미술관들이 송영옥 컬렉션을 포함해서, 이분들이 국내관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올림픽 열면서 한국을 방문하면서 우리 미술사에 서서히 편입되었다. 송영옥 화백도 마찬가지다. 조선 노동자들이 1일 일하면 50전이다. 일본 사람들과 달리 조선인들이 낮은 대접 받는 것을 그림과 만화로 그리게 했다. 

(그림을 보며) 재일 교포 화가다. 송영옥 선생님과 친하다. 모든 그림이 분노에 차있다. 소리를 치고, 거의 작가 심정을 담았다. 재일교포 사회의 비참한 현실이다. 전화황 화백도 있다. 재일교포 화가 중에서도 유명하다, 이분의 형이 서울대 교수도 지냈던 전봉춘이라고 한다. 동생이 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왔다. 이런 작품도 1950년대의 가난에 시달리던 남한을 그려냈다.

조향규라는 작가다. 송영옥 화백과도 친하다. 진주 출신이다. 진주 사범학교 졸업하고, 일본 미술계에 좋은 작품 남겼다. 사범학교 출신들이 상당히 우수하다. 당시 일본 미술계의 평론가도 친하게 지냈다. 일본 미술사에서 이 조향규가 어느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월북이 안하고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북한에 가서 1년간 잠시 스케치도 했지만, 거의 숙청이었다. 일본의 유명 미술관에도 많이 소장되었다. 작품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창고식이다. 이본에 가자마자 부두에서 노역을 많이 했다. 창고 시리즈. 재질감이 기계인간 같은 것 그리면서 현대 사회 인간소외를 그린 작품이 상당하다. 맨홀이 유명하다. 공사 현장인데, 그런 것들을 많이 그렸다. 

문성근이라는 작가다. 30대 중반에 요절했다. 박인식 작가는 해방 이전에 일본 가서 학위 받았다. 내년이 이 박인식 작가의 탄생 100주년일 것이다. 다 제주도 출신이다. 이런 젊은 작가도 있다. 광주를 다룬 작품이다. 우리는 오히려 광주를 못 따라 왔다. 제3의 한국인으로서 다를 수 있다. 고통의 인간상에 대해 외국에서는 그림도 그리고, 일본에서 김지하 구명운동도 했다. 그런 사람들도 조총련에 가입한 화가들처럼 한국에 못 들어 왔다. 교토에는 우리 불교 유산들이 많다. 이런 일본에서 불상 화가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유명해졌다.

역시 송영옥 화백은 추상미술 현대주의 작가는 아니고, 이 전에 보여준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발언하고, 미술작품에 담기는 작가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향기가 많다. 앞으로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송영옥 선생의 작품 생애를 볼 차례다. 처음 만난 건 1990년 4월이다. 미술잡지에서 근무했다. 송영옥 화백 작품이 6페이지에 걸쳐서 소개되었다. 당시에 상당히 기뻐했다. 그 이후로는 뵙지 못했다. 한국에서 개인전 제안도 있었지만, 1995년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다른 지역도 아니고 제주에서 작품전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 아닌가 싶다. 송 화백의 작품을 보면, 자기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온 그 생애를 마치 일기 쓰듯이 처절하게 기록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대단히 자전적인 글이다. 자전 소설 이런 이야기를 담았다. 자기 생에 스토리 섞어서 이야기 하자면, 그림 자체가 자화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송 화백의 생애를 잠깐 보면 1페이지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1917년생이다.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 뒤에 일본의 동인그룹 잡지에 실었다. 그 뒤를 보면 제주도에 와서 밥을 먹고 서울 부산 와서 배타고 넘어온 그런 이야기는 많다. 어쩌면 이분이 자기가 살아온 것들을 기록했다. 1993년도에 송 화백 댁에 가본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이 분 작품 세계를 보면 대단히 가난하고, 그런 삶을 살아오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3살 때, 제주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행 키미가요와라는 배를 탔다. 그때는 오사카로 교포들이 많이 갔다. 재일교포 역사를 보면, 오사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제주도 하고 남쪽 지역의 사람이다. 함경도나 경남, 제주 사람들이 오사카에 집중되어 있다. 키미가요와 라는 것을 조사했더니 재밌다. 각주에 적었지만, 배 운임이 12엔 50전이다. 여직공들의 월급이다. 제주에서 오사카가 일주일 걸려서 도착한다. 마중 나온 사람 없이 알아서 가야한다. 1년간 동네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교를 다녔다. 공장과 학교를 둘 다 가야 했다.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교를 다녔다. 계속 가난했다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생애 큰 희망이 된 것이었다. 오사카에 나까노시만 야만 인구소가 있다. 요즘 인터넷이 잘 되서 역사를 뒤지면 다 나온다. 1941년에 오사카 미술학교라는 곳에 입학 졸업했다. 이곳은 당시 부산 경남 부근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인 그룹이 있었다. 6․25때 북한으로 갔지만, 운보 김기찬이라는 분과 동갑내기인데 북한 최고의 화가다. 동양화 전공이다. 그래서 여기를 다녔는데, 다니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졸업하고 나서 다시 전쟁말기를 보내는데, 그때도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다. 이때 많은 미술학도들이 죽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은 작가가 상당히 많다. 태평양 전쟁 때 나가서 죽은 사람이 상당하다.  2000년대 이후로 오사카 미술학교는 없다.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사람도 많았다. 송 선생님도 귀국 못하고 남한에도 좌우의 이데올로기가 격돌하고, 6․25가 터져서 번번이 귀국길이 가로막혔다. 해방 직후 50년대 까지는 오사카에 거주했다. 거주하면서 그 당시에는 초상화도 그리고,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일본 앙데팡당 등 일본 새로운 미술 단체의 작품도 출품하게 되고, 이런 시기다. 

이게 1950년대 작품이다. 초기의 작품을 경향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분이 제주도 출신이라서 자기 기억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아직도 그 당시 해방되었을 때, 20~30대 초반이었다. 그 자기 고향에 대한 기억들을 작품에 옮기고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일본의 구상미술 속에 그런 경향들이 많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연구가 되어야 되지만, 1930년대의 사회주의 이념들이 있고, 멕시코의 백파들이 있다. 아무튼 1950년대 작품은 내용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 향수 등 표현주의적인 작품이 많다. 이것도 추억이 작품이다  이 그림은 여성 마술사를 대부분이 서커스단의 소품이다.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강근하게 그렸다. 표정을 보면 어두워 보인다. 이런 주제들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하고 조금 다르다. 일본은 상당히 내에서도 남북 이데올로기기 긴장이 아직도 있다 이게 사실은 작품이 남아있지 않지만, 받은 자료다. 이것 보면 솜씨도 있다. 

장구춤 추는 것, 소도 있고, 명태도 있고, 이런 것도 있다. 송 선생의 생에서 중요한 것은 오사카에서 도쿄로 넘어온 1957년이다. 초기 작품과 다르게 자기의 색을 분명히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조향규와 15살 차이다. 조향규를 통해서 북쪽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조향규 작품 중 창고 시리즈하고도 상당히 연결이 되는 작품이다. 벽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바깥을 응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고통스러운 벽을 묘사했다. 이런 것을 통해 어쩌면 자기와 같이 고국을 떠나 산 자이니치들의 아픔의 담았다. 이런걸 보면 어떤가? 큰 배에 어느 한 부분을 그런 모습이다. 여기 안에서 굿바이 하는 거다. 이런 작품들. 이것도 같은 배인데, 해골 같은 것을 쌓았다. 배인지 혹은 어떤 벽이다. 비슷한 작품이다. 이것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배인지 벽이 있다. 담이 있고, 두 사람이 손들고 있다. 여러 가지고 해석된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 등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도 해골들이 있다. 짓누르는 부분들이 보인다. 이것도 무섭다. 이때의 인물들 보면 이런 갇혀있는 창고 혹은 배, 벽에서 바깥쪽을 응시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가 어떻게 보면 극한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 전쟁. 자기가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삶 자체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북송선을 연상하는 작품도 있다. <슬픔>이라는 작품인데, 이것은 의욕시리즈 중 하나다. 딸이 일본사람과 결혼했다. 딸이 교통사고 당해서 정신병자 될 지경인데, 사위는 돈만 챙기고 자식 버리고 달아났다. 기막힌 일이다.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딸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주의라고 했을 때, 흔히 뭉크란 작가가 있다. 절규라는 작품, 형태를 왜곡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곡하면 어떤 경우에는 왜곡하면 해학적인 부분도 있다. 대단히 공포감마저 줄 정도로 그런 효과가 있다. 송영옥 작품 전체적으로 보면 왜곡이 있다. 고통을 정신적으로 그려내서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울분이 모래성처럼 나오는 것이다. 꿈틀거린다.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이것을 통해 나타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이라고 보면 된다. 가난하게 사는데, 삼면경으로 압박하고 있는 상황들을 나타냈다. 교포 사회가 남쪽의 그것도 싫고, 북쪽도 싫고 또 일본에 살고 있다. 이것도 저곳도 아닌 그런 처지에 대해 이런 것들을 그렸다. 사는 게 감옥 같다는 것이다. 감옥에 사는데, 과장이 되었다. 얼굴이 마치 야수 같다. 울부짖는 것이다. 1924년에서 태어나서 1977년 11월 18일이라고 적혀있다. 초상이다. 특별히 종교를 빠져서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무슨 십자가를 지고 있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유심히 보았는데, 아무래도 미국 사람처럼 보인다. 세 사람의 얼굴들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세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남북일관계가 있다. 이것은 아까 본 그 작품이 다른 버전이다. 훨씬 더 야수 같고, 포승줄에 묶여있다. 이것은 앞선 작품과 유사하다. 칠판 혹은 벽이 짓누르는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모아 놨다. 이작품은 여기 보면 수갑을 차고 있다. 
박정희 정권시절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다. 안기부 중앙정보국의 소행이 드러났지만, 일본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했다. 과정이 배로 납치했는데, 여러 가지 위에 보면 미군기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얼굴도 좀 닮았다. 일본에 있어서 가능했다. 상당히 센 작품이다. 그 다음에 광주까지 온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자이니치의 특수한 삶을 그렸다. 첫 째는 민족적인 문제가 있고 이데올로기가 있다. 먹고 사는 문제라는 이런 상황에서 담고 있다. 삼면경을 보면 독방에 혼자서 절규 하는듯한 모습이다. 목이 터져라 분노하고 있다. 야수처럼 요동치는 것이 있다. 
남한에 대한 1972년에 김대중 납치사건에 이어 1980년대에 남한 군부독재의 극적으로 치달으면서 5.18광주 민주화 항쟁은 일본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 내에서 재일 교포 인권문제도 다룬 것이 많다. 원폭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다룬데 많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다뤘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돔이고, 여기 보면 땅속에서 손가락이다. 땅 속에서 손가락을 집어내면서 기어 올라오려고 하는 모습을 그렸다. 죽었던 영혼이 잠들지 못하고, 영원히 땅을 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이것도 보면 사람들 형상 같다. 영혼도 뭉친 느낌이다. 

이 작품이 대단히 완성도가 높고, 좋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전 작품들은 직접적이다. 제가 만난 송 화백은 얌전하다. 자기 이야기를 잘 안한다. 그런데, 일본 사람 이야기 할 때는 대단히 과격하다. 지금 작품을 보면 초기 작품들은 직접적이다. 오히려 직접적이다 못해 울분을 참지 못하는 정도의 작품들이 많다. 직설적이다. 이런 것들은 다르다. 히로시마 독이 물속에 비친 모습이다. 3~40대 시절에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장년기 때에는 바뀐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입고 죽은 분들에 대한 위령을 담고 있다. 

일본 국회의사당과 일그러진 사람 모습의 그림은 이전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히로시마 소재로 한 그림을 봤다. 그 피해자들에게 추도의 마음을 작품에 담고 있다. 주로 보면 직접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다가 1977년도에 아내가 당뇨로 세상을 떠났다. 송 화백이 10년이나 병수발을 했다. 1970년대 말부터 개 시리즈로 작품의 양상이 바뀌었다. 개 시리즈로 바뀌었지만, 개도 결국 자기 자신인 자이니치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중섭의 소와 같은 맥락이다. 자기 자신이다. 오히려 더 정확하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 개라는 것은 민족혼의 부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개라는 것은 이중섭의 소는 개인에 가깝다. 산다는 것은 다리가 온전하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다. 네다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라린 눈이다. 이빨들을 보면 투견 이상이다. 태양인지 달인지 모르지만, 남북 민족을 이야기 한다. 배경을 그리지 않는다. 배경이 받쳐 있다. 배경이 열려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전반기에는 벽이었다. 이건 어떤 한계상황이나 벽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벽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후기로 가면 벽은 아니다. 하늘이나 바다거나 전보다 더 열려있다. 희망의 벽일 수도 있다. 직접적인 표현 보다는 간접적으로 사용한 이런 작품들은 일본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이전 작품의 훨씬 더 생동감이나 약동감이 많이 나타나고, 광주 작품에서 보면 고발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너무 직접적인 표현 때문에 무겁다. 불필요한 설명을 거둬냈다. 이중섭 작품을 굳이 비교하자면, 배경이 없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인위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지표에 머리를 들고,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온몸으로 놀고 있다. 억제된 홀로의 쓰디쓴 빛,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겪고 난 이후 억제된 표면을 관통하는 낮은 목소리 폭로의 쓰디쓴 빛이라고 평론가가 이야기한다. 작품의 말년은 초기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다가 말년은 개 시리즈로 되었다. 이런 것 말고도 달이나 불상전골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굳이 송영옥 선생님의 특징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신의 문화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많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평가를 해봐야 될 것 같다. 작품 활동을 보면 일본에서 개인전 3회, 활동 무대가 자유미술가협회였다. 처음에 생길 때는 정의적인 미술로 등장했다. 1930년대는 이중섭 등 기존 보수적인 제도권 우리나라도 따르면 국전, 문전은 (일본)국가에서 하는 전람회하고는 다른 경향을 가진 단체였다. 이중섭이나 유영국도 앞선 미술을 발표한 장이었다. 초기정신이 무뎌진다. 송 선생이 활동한 1950년대 60년대 이후는 자유 미술가 협회가 초기의 몇 단계를 거쳐서 이미 그 자체도 보수화 되었다. 냉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본 주류미술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없다. 주류보다는 개인적인 활동을 했던 예술가였다. 그렇게 보면, 일본에서 이분의 활동이 너무 메아리가 너무 작은 외침으로 끝나지 않았는지 아쉬움을 느낀다. 

결론은 송 화백의 활동이 자유미술가협회나 몇 군데의 협회 지원을 거쳤다 해도, 이 사람으로서는 디아스포라라는 표현하는 양식 자체는 오로지 미술밖에 없었고, 이분의 평가가 작품전후 미술의 주류라는 것은 현대주의다. 현대미술이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송영옥 화백의 작품이 일본  이 작품이 한국에 왔을 때 평가가 달라진다. 이른바 사회적 발언 자전의 예술 그런 측면에서는 송영옥만큼 강렬하고 직접적이고 솔직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는 197~80년대는 그게 잘 안 되는 분위기였다. 송영옥으로서 가장 불행했던 시대 역사 그 기억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데, 자이니치가 그려낸 민족사가 우리 미술사에 편입되었을 때 주는 의미가 크다. 그래서 송영옥이라는 작가에 대한 평가가 한국 미술 안에서 재해석 재평가 되어야 한다. 이 전시도 이런 각도에서 미술사적으로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에서 이런 전시가 열릴 때 송영옥 예술은 부활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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