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1) 
어머니는 개한테 물리면서 사정사정해 얻어온 장, 아버지는 한입에 다 먹는다

* 어멍 : 어머니의 방언
* 물리멍 : 물리면서의 방언
* 빌어온 : (사정사정해) 빌려온, 얻어온
* 아방 : 아버지의 방언
* 혼굴레에 : 한입에, 단번에

옛날 살림 형편에 주된 반찬으로 된장을 빼놓을 수 없었다. 국 끓이고 나물 무치고 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고, 풋고추를 찍어 먹는 데도 없어선 안되는 게 된장이다. 더욱이 한여름 밭일할 때도 냉수에 된장만 풀어 놓으면 냉국이 되어 식은 밥 말아 훌훌 물마시듯 먹곤 하던 게 제주 농촌의 식생활이었다.
  
한데 그 긴요한 된장도 온 식구가 먹을 일 년치 분량을 여유 있게 담가 사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먹다 떨어지면 가정의 살림꾼인 어머니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수단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된장을 얻어오게 된다. 남의 집을 드나들다 그 집 누렁이에게 물리는 변을 당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공들여 구해 온 된장을 아버지는 조금씩 아껴 먹기는커녕 혼자 독차지해 한입에 먹어치운다 함이다. 여간 몰염치한 게 아니다. 자기만 생각했지 집안 식구는 안중에도 없는 처사가 아닌가. 참 매정하고 야속하다. 삶이 어렵던 시절에도 가부장적 권위에 사로잡혔던 그릇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전 제주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말이 있다. 

“소나이엔 혼 건 들러리창지 엇나게”
(남자아늘 건 창자도 [샘이라곤] 없다니까), 
“소나인 실개도 엇나”
(남자는 쓸개도 없다) 

잔셈이라곤 없어 남 더욱이 가솔도 위할 줄 모른다 함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집안일에 헌신하던 여성의 역할을 떠올리면서, 남자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염치없는 행동을 빗대어 꼬집는 말이다.

“어멍은 빌어온 장, 아방은 말똥만씩 먹나”, “아망은 좁썰만씩 빌어오민 아덜은 말똥만씩 먹나”라고도 한다.

여기서 그냥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제주여성의 희생정신과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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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발간한 책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 지역사회 발전에 크기 기여한 인물중 41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41명의 생애를 담았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역사적‧지리적으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굳센 의지로 못 입고 못 먹던 기한(飢寒)의 시절을 헤쳐 온 제주여성의 힘은 억세고 끈질기고 담대했다.

그것은 학식이 있고 없고 하고는 전혀 별개다. 제주 여성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도전과 지혜로움이 특유의 DNA, 공통인자로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섬이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속에서 파도처럼 덮쳐드는 삶의 악조건들을 타개해 활로를 찾으려는 악전고투의 나날이 낳은 성과는 실로 눈부시다.

1620년(인조 2)부터 제주 여성들에게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내려지면서 섬에 꽁꽁 갇혀 지내야 했다. 계속되는 흉년과 과중한 진상(進上), 부역 등으로 말미암아 제주인들이 육지로 속속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자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것은, 어머니이면서 아내요 딸인 여자들을 볼모(인질)로 삼아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적인 장치였다.

조선왕조 250년 간 굳게 걸어 잠근 철비(鐵扉) 같은 문 안에서 제주 여성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들의 내적‧정신적 능력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출구가 열리면서 움츠러들었던 제주 여성의 도전정신과 빼어난 적응력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활짝 날개를 폈다.
  
제주 해녀들이 마치 철새처럼 봄이 되면 젖먹이를 떼어 놓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하면서 육지로 나갔던 것이다. 급기야는 원정물질로, 점차 영역을 넓혀 나라 안에 머물지 않고 일본, 중국, 러시아로까지 뻗어 나아갔다. 제주 여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놀라운 날갯짓이다.

단순히 돈벌이가 목적이어라고만 볼 수 없다. 제주 여성의 내면에 억압됐던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갈구와 미지(未知)에의 동경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주 여성들은 오랜 동안 심한 홀대를 받아 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의 90%를 제대로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였으니 어림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뿌리 깊은 그릇된 인습(因襲)이 아닐 수 없다.

제주 여성에게서 우리는 강인하고 맹렬한 생명력을 느낀다. 수백 년 모진 세월을 버티며 견뎌 온 제주 여성의 상징이 바로 해녀 아닌가. 그들이 마침내 제주 경제의 한 축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은 제주도민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어멍은 개 물리멍 빌어온 장~”에 등장한 ‘어멍’이야말로 바로 제주 여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제주 여성의 진면목이다. 얼마나 억척스러운가. 자상하고 자애로운가. 사나운 동네 개에게 물리면서도 마음속에는 오로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지 않으냐.
  
한데 소위 ‘소나이’란 가장은 집에 들어앉았다 내자가 얻어온 음식을, 그것도 한입에 집어 삼키고 있으니 이런 얌체가 세상 어디 또 있을꼬. 이쯤 되고 보면, ‘참말로 소나이엔 혼 게 실개 엇나’ 한 말이 백 번 맞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도 때는 늦지 않으리. 제주 소나이덜 이제부터라도 ‘개 물리멍 빌어 온 장‘ 가늠해 가며 먹는 염치를 한번쯤 발휘해야 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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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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