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26) 쇠처럼 살라는데 / 손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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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미

아내는 나더러 쇠처럼 살라는데

 그 쇠가 무슨 쇠냐 타령조로 읊어보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돌쇠에다 땀 흘려 일할 때는 억척스런 마당쇠, 닫힌 마음 철컥 여는 만능열쇠로 살라다가 제 잘못엔 입 꽉 다문 자물쇠로 또 살라네. 모진 풍파 끄떡없이 무쇠처럼 겪어내고 자본주의 경쟁시대 구두쇠로 견뎌내도 둥글둥글 굴렁쇠에 밤에는 변강쇠, 이 쇠 저 쇠 다 좋다며 닦달하는 요즘 세상

나는야 쇠귀에 경 읽기 어화둥둥 모르쇠

-손증호 <쇠처럼 살라는데> 전문-

시인의 어투에 맞추어 타령조로 쇠를 따라간다. 전라도 어느 들판을 가로지르며 괭과리와 장구를 치며 가도 좋겠다. 목청 좋은 사내가 부르는 걸쭉한 남도 타령이 들판에 퍼지면 막걸리 한 두 사발쯤 들이켜도 좋겠다. 상대적으로 타령조에 익숙하지 않은 제주도이지만 우리 민족의 몸에 원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흥이 아닌가. 어깨가 덩실,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러나 이 타령조에 묻어 있는 서글픔은 어찌할 것인가. 타령조의 바탕에 깔린 서글픔 안으로 단단한 쇠들을 담가 놓으면, 흥건한 눈물의 샘터 속에서 노근노근 녹아내리는 서러움과 슬픔. 고도로 계산된 시인의 의도에 의해 우리는 물색없이 어깨 들썩이다가 머뭇머뭇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다. 

돌쇠, 마당쇠, 만능열쇠, 자물쇠, 무쇠, 구두쇠, 굴렁쇠, 변강쇠, 모르쇠까지, 처해 있는 위치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야 하는 것은 비단 남편만이 아니다. 충직하고, 억척스럽고, 아무리 일을 잘 해도 태생으로 결정된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도 참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다 참으면서 살아도 나아지는 게 없다. 그래서 차라리 아내의 잔소리는 쇠귀에 경 읽기처럼 모르쇠로 버티는 게 상책인지도 모르겠다.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진입을 앞두고 있고, 세계경제순위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의 슬픈 자화상인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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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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