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제주의소리>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섬의 산물] 3. 이도1동 가락쿳물
 
제주시 이도1동은 탐라국의 시조 삼신인(三神人)인 활을 쏘아 거주할 땅을 일도(一徒)·이도(二徒)·삼도(三徒)로 나누어 정한 데서 유래된 마을이다. 산지천의 가락천변(加樂川邊)에 있는 가령촌(嘉嶺忖)을 중심으로 이도(二徒)라 칭했다. 이 지역은 제주의 탄생을 알리는 모흥굴 삼성신화의 근원지인 삼성혈과 다섯 사람이 옛 현인을 기리는 귤림서원지인 오현단, 그리고 제주성곽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성의 생명수인 최대 식수는 가락쿳물이었다. 김정이 쓴 충암집의 ‘제주풍토록’에서 “내가 사는 근처에서는 다행히 샘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성남과원 동쪽 모퉁이에서 솟아나 큰물을 이루고 동성 밑으로 빠진다”고 하였다. 동쪽에서 솟아난 큰물은 ‘가락쿳물’로 동성 밑인 산지천의 지류인 가락천으로 흘러든다고도 하였다.

1.png
▲ 가락쿳물 (멸실된 지점으로 식수통이 있던 자리). 사진=고병련. ⓒ제주의소리
2.png
▲ 가락쿳물과 빨래터가 있던 자리에 세운 표석. 사진=고병련. ⓒ제주의소리
3.png
▲ 가락쿳물 옛 전경(제주시 옛 사진 자료). 사진=고병련. ⓒ제주의소리

가락쿳물은 오현단 북동쪽 제주성 남문 안 냇가인 가락천의 용출수다. 이 물은 1970년대에 와서 상부지역에서의 지하수개발과 산물일대의 도시개발로 사라져 버렸다. 가락쿳물의 뜻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제주어에 ‘가락 밀려 불라’(힘껏 밀려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가락은 세차게 미는 것을 말하는데, 가락쿳물은 세차게 솟는 큰물(쿳은 큰이란 의미의 제주어)이란 뜻으로 보여 진다. 또는 음악에서 가락(加樂)은 음의 흐름이 있는 높낮이인 곡조로써 멜로디(꾸밈음)의 뜻으로 볼 때 물이 솟아 흘러가는 소리가 음악적이어서 ‘높고 낮음이 있는 세차고 큰물’이라는 뜻으로 가락쿳물(加樂泉)이라고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한자어로 가락천(嘉樂泉)이라 쓰기도 하는데, 가락(嘉樂)을 경사스러운 음악이란 의미를 가지므로 전술한 가락천(加樂泉)과 같은 의미가 된다. 아니면 ‘가(嘉)’는 맛이 좋다는 의미가 있고, ‘락(樂)’은 즐거움, 좋음이란 뜻이 있으므로, 즐거움을 주는 좋은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가락귀(嘉樂貴:가락쿳)라고도 한 것으로 봐서 ‘귀(貴)’는 귀하게 여기다, 소중하다란 의미가 있으므로, 즐거움을 주는 좋고 귀한 물이란 의미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용출수는 제주성 남수문이 있었던 남수각이란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에서 솟아난다고 해서 ‘남수각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근에 남수각 언덕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청풍대라는 제이각이 복원되었다.

이 산물은 삼천서당 일대에서 용출하는 ‘가막새미’란 산물과 함께 제주성의 귀한 식수였다. 이형상 ‘남환박물’에서 가락쿳물에 대해 “섬 안에는 모두 감천(甘泉)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정도 거리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기고, 멀면 혹은 4, 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지방민은 익숙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인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의 가락천(嘉樂泉)은 성안에 있고 용출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 명월소(明月所)에는 한 감천(甘泉)이 있는데 역시 심히 달지 않다. 그리고 제주의 동성 안에 산지천(山地泉, 가락쿳물)이 있는데 석조(石槽)의 길이가 3칸이고 너비가 1칸이다. 샘이 사면을 따라 용출하며 물맛이 극히 좋고 차갑다. 겨울에는 따뜻하여 탕(湯)과 같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얼음 같다. 성안 3000호가 모두 여기에서 떠다 마시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없어져 마를 때가 없으니, 실로 이는 서울 외에서는 드문 명천(名泉)이다. 토질(土疾)이 있어도 이 물을 마시면 곧 자연히 차도가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증보탐라지」에는 “제주읍 이도리에 있는 물로 큰 바위 아래 굴이 있어 한줄기 천맥이 용출하니 깊이가 한길이나 된다. 겨울철에는 수량이 보통 작지만 여름 우기에는 찰찰 흘러 넘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성곽 읍성을 보면 성내에는 솟는 물이 없고 성 남쪽에 큰 돌 아래 큰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가락쿳물(嘉樂泉)이라 했으며, 깊이는 1장이었다. 흐름을 횡단하여 겹성을 쌓았는데, 성안 사람들이 길어다 마신다”고 기록한다.

원래 제주성 안에는 식수인 용출수가 없었다. 조선  중종(1512년) 목사 김석철(金錫哲)이 성을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출 때 성안에 식수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가락쿳물을 급수하기 위해 별도의 중성(重城)을 쌓았다고 한다. 이상의 옛 기록을 유추해 볼 때 가락쿳물은 30톤 정도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식수통을 가진 제주성안 약 3000호, 약 만명의 사람들이 생명수로 성안 최대 식수인 것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성안의 최대 식수였던 가락쿳물이 솟아 흘러내리던 터는 지금 도로가 되어버렸지만, 가락쿳물로 가던 옛 올레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어 언제가 다시 돌아올 가락쿳물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제주성 복원 시 이 산물도 복원되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가락쿳물은 물만이 아니라 백성의 희노애락을 솟아내어 흘렀던 용출수로 복원은 제주성을 살리고 제주 섬에 다시 생명을 불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4.png
▲ 가락쿳물이 흐르던 냇가인 가락천(매립 도로화로 멸실). 사진=고병련. ⓒ제주의소리
5.png
▲ 가락쿳물 가던 옛 올레. 사진=고병련. ⓒ제주의소리

# 고병련(高柄鍊)

cats.jpg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자원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사단법인 동려 이사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고연(노인요양시설 연화원) 이사장을 맡고있다. 또한 환경부 중앙환경보전위원과 행정자치부 재해분석조사위원, 제주도 도시계획심의, 통합영향평가심의, 교통영향평가심의, 건축심의, 지하수심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건설기술심의와 사전재해심의 위원이다.

제주 섬의 생명수인 물을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인 ‘제주생명의물지키기운동본부’ 결성과 함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용천수 보호를 위한 연구와 조사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을 통해 지킴이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섬의 생명수, 제주산물> 등의 저서와  <해수침입으로 인한 해안지하수의 염분화 특성> 등 100여편의 학술연구물(논문, 학술발표, 보고서)을 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