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2)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이상훈 역, 한마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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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이상훈 역, 한마음사, 2010. 사진=알라딘.

1. 자유민주주의는 최후의 정체인가?

학생들과 간혹 시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다보면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고민하는 학생들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제어하는 어떤 벽이 존재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경제적 양극화, 청년 실업, 환경, 성적 소수자 등등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논할 때 학생들은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놓고 보면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이다. 자본주의적인 사회질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등치된다. 시장경제를 전제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 체제로서의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통합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적인 소유를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이자, 사회구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최우선의 가치로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모순적인 상황에 봉착한다.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자본주의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선에서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유민주주의가 인류가 도달한 최선이자 최후의 정치 체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희망을 갖기 힘들게 된다. 수많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정치 체제인 자유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지향하기보다는 그 문제들을 통해서 유지되는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유민주주의를 최선이자 최후의 정체로 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고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의 종착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우파 보수주의자들은 그 체제 속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는 이런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 전쟁터였다. 1980년대 말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들고 나오면서 사회주의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냉전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여전히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마치 정치적인 갈라파고스 제도와도 같다. 빨갱이니 좌파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는 여전히 현실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빨갱이의 책동에 맞서 지켜야 할 소중한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체제이다. 그런데 여전히 사회적인 불평등과 부자유를 낳는 자유민주주의를 그렇게 지켜내야 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공산당이 싫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이승복 어린이에 관한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반공교육을 받았던 필자 세대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긍정한다. 이 세대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도록 교육받은 세대이다. 그래서 소위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일본의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고 미국을 구원자로 떠받드는 전혀 보수주의적이지 않은 행태를 보여도 그 이유를 따져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빨갱이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이 여전히 설득력 없는 논리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한다면 그들을 위해서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려면 지키고자 하는 전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왜 지켜야 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후쿠야마의 이 책은 자유민주주의가 왜 옹호되어야 할 최선이자 최후의 정치 체제인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2. 우월원망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후쿠야마는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나 “인류 최후의 정부형태”가 될지도 모르며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종말”이 된다고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군주제, 파시즘, 공산주의 등을 물리치고 한 방향으로 진보해나가는 역사의 도정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근거로서 그동안 생산력의 발달, 효용성의  증가, 개성의 신장, 자유의 확장, 평등의 증가 등등이 동원되었다. 후쿠야마의 독창성은 그런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서 ‘기개’ 혹은 ‘패기’라고 하는 인간성의 한 측면을 자유민주주의의 정당성과 연결 짓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개념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져온 것인데,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 기개, 욕망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하고 국가차원의 정의를 이 세 가지를 조화롭게 공존시키는 데서 찾았다. 후쿠야마는 기개 혹은 패기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종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며, 이성이나 욕망과 마찬가지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패기가 자유주의 경제와 자유주의 정치를 연결시키는 고리라는 것이 후쿠야마의 주장이다. 파시즘은 이성적인 철인에 의한 효율적인 통치 체제일 수도 있고, 자유시장 경제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최적의 경제 시스템일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과 욕망에 의해서만 지배당하는 인간은 어떤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인정에 대한 욕구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명령에 순응하고 물질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욕망이 있다. 시장경제하의 독재정치는 자유주의 정치 체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거꾸로 자유주의적인 사회는 반드시 시장경제를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패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인물로서 후쿠야마는 니체를 꼽고 있다. 필자는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후쿠야마의 니체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후쿠야마의 말대로 니체가 근대의 민주주의를 노예적 윤리가 무조건적인 승리를 거둔 결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전형적인 시민이란 “쾌적한 자기보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훌륭한 가치에 대한 긍지 높은 신념마저 내던져 버리는 ‘최후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시민은 ‘가슴이 없는’ 즉 ‘패기’가 없이 욕망과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타인보다 훌륭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구를 포기하면 그런 인간은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고, 하찮은 욕망을 뛰어넘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최후의 인간은 요컨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사회주의의 몰락이 중앙집중적인 계획경제 시스템이 사회구성원의 패기를 없애버리고 사소한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우월욕망을 지켜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소비주의에 물든 자유주의 사회는 구 사회주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욕망이 실현되는 데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최후의 인간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의 미래가 거기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어느 정도로 우월욕망을 유지할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기개 혹은 패기는 정의와 관련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패기가 있는 사람은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다. 부당한 권력에 대해 분노하는 인간은 패기가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 패기는 어떤 경계를 넘게 되면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우월욕망은 제국주의로 나아갈 것이고, 국내 정치에서는 나치와 같은 파시즘을 낳을 것이다. 우월욕망은 따라서 유지하되 통제되어야 하는 양날의 검이다. 후쿠야마는 보수주의자답게 다시 플라톤으로 되돌아가 패기는 이성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욕망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안겨주었다는 이유에서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찬양한다. 그런데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주의자의 주장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그런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고 그런 자신에게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최후의 인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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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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